2024-04-24 18:57 (수)
돈으로 벼슬 판 나라
돈으로 벼슬 판 나라
  • 권우상
  • 승인 2015.09.17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권우상 명리학자ㆍ역사소설가
배비장 통해 벼슬 매도 알아
조조 부친 1억 전에 ‘자리’ 얻어
현재 가능땐 재벌, 겸직 많을 듯

 한나라 환제가 후궁 5천명~6천명이나 되는 여자를 두고 색정에 눈을 밝혔으나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하고 30대에 요절해 한낱 정후(亭侯)의 가문에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몇 백호에서 나오는 세금을 받아 살아 온 유굉(劉宏)이라는 인물이 급작스레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영제다. 영제의 짧은 일생에서 가장 알려진 일은 벼슬장사가 아닌가 싶다. 봉건사회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벼슬을 사도록 허락하는 것은 조정에서 재정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근대에 이르기까지 써먹었다. 그런데 벼슬마다 값을 정해 놓고는 “벼슬을 너무 싸게 팔았다”고 후회한 일화를 남긴 영제의 가장 기발한 점은 외상으로 벼슬을 팔았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정위(廷尉 : 법무부 장관격) 최열(崔烈)이 500만 전을 바쳐 사도 벼슬을 샀는데 영제가 “1천만 전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하고 후회한 뒤로는 값이 자꾸만 올라가 큰 군의 태수가 되려면 2천만 전을 써야 했다.

 조조의 아버지 조승은 188년에 1억 전을 내고 태위라는 높은 벼슬을 샀으니 그에게는 돈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적었다. 영제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벌어 돈을 뽑아내기 위해 돈이 없는 사람이 외상으로 벼슬을 할 수 있으나 벼슬을 한 다음에는 현금을 내는 것보다 두 배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신임 관원이나 자리를 옮기는 관원들은 반드시 궁궐을 보수할 돈을 바쳐야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들은 돈을 낼 힘도 없고 이후에 내는 것도 싫어했다. 돈을 벌자면 백성들을 두들겨 빨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에 눈이 어두워진 황제와 환관들은 빨리 임지로 가라고 관원들을 핍박했다.

 거록군 태수로 임명된 군졸 사마직(司馬直)은 “깨끗한 명성을 누렸으니 300만 전을 깎아준다”는 특혜를 받았다. 사마직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차마 백성을 착취할 수 없다”는 표문을 올리고 약을 먹고 자살했다. 사마직이 올린 글을 받은 영제는 그일 때문에 잠시 궁궐 보수금을 받아내지 않았으나 후한의 사회는 이미 썩은 뒤였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돈으로 벼슬을 사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영조시대에 돈으로 벼슬을 사기도 했다. 영조왕 때 한양의 남산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 장경문은 당쟁으로 몰락한 정승의 후손으로 낡은 집 한 채에 의지해 죽지 못해 간신히 연명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민생을 살피고자 암행 길에 나섰다가 장경문의 비참한 생활을 본 임금은 사정을 딱하게 여겨 장경문을 제주 목사의 관직을 내렸다.

 이때 새우젓 최대 집산지인 한양의 마포 서강가에 사는 배서방은 그의 아버지가 새우젓 장사로 전답을 꽤 모아 가세는 넉넉했지만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한 얼간이인 데다 건달 기질까지 있어 날마다 술과 기생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돈 천 냥쯤 쓰면 비장(裨將)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솔깃했다. 천냥이라면 새우젓 천 독을 팔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이라 입이 딱 벌어졌지만 상놈이 벼슬자리를 얻자면 뇌물을 쓰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면접시험을 보는 날 젊은이들과 함께 줄을 섰다가 한 사람이 사랑방 댓돌 밑으로 나가면 장경문은 긴장죽으로 손짓을 하며 인물을 심사하는 것이었다. 배 서방 차례가 되자 장경문은 “재산은 있느냐?”고 물었다. “아비가 새우젓 장수라 벼 천석은 합지요” “으음.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장경문은 가까이 온 배 서방에게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하나 보여줬다.

 종이에는 이방 900냥, 호방 800냥, 예방 700냥, 공방 600냥, 그리고 다시 행을 바꿔 형방 800냥 등이 쓰여 있었다. 배 서방이 주욱 훑어보니 다른 자리엔 각각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이미 팔렸다는 표시고 예방과 형방만이 빈자리였다. 배 서방은 100냥을 더 쓰면 육방의 우두머리 이방을 차지할 수 있는데 벌써 팔려 나갔다고 하니 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할 수 없이 800냥을 주고 형방을 사서 비장 벼슬을 얻었다. 역사에 등장하는 배비장이 바로 그 인물이다. 만일 지금 우리 한국에서 돈으로 벼슬을 살 수 있다면 재벌 총수들은 모두 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