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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어떤 외모 지녔기에
명성황후 어떤 외모 지녔기에
  • 송종복
  • 승인 2015.09.14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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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조선의 왕은 27명인데 왕비는 43여 명이고 그 중에 민씨는 3명이다. 3대 태종ㆍ26대 고종ㆍ27대 순종의 정비가 민씨이다. 대원군도 3명이다. 즉, 14대 선조 생부 덕흥대원군ㆍ25대 철종 생부 전계대원군ㆍ26대 고종 생부 흥선대원군이다. 따라서 민비하면 고종의 정비(민자영)를 주로 말하고 대원군하면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하응)을 주로 말한다.

 민비는 어떤 외모를 지녔기에 고종이 마누라 치마폭에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1993년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대원군이 황후의 어릴 적 모습을 본 묘사가 있다. 즉 ‘흥선은 민 소저를 보았다. 숭글숭글 얽기는 했지만 영특하게 생긴 소녀였다’고 했다. 일설에는 ‘명성황후는 곰보에 엄청난 추녀’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일화로 러시아 공사 웨버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한 화장품을 민비가 남용한 결과, 수은이 든 진주 분을 너무 사용했기에 피부가 푸르뎅뎅해 궁중에 거울을 깨워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못 생겼다, 잘 생겼다’는 기록은 없고 ‘정말 우아했다’는 말만 존재한다. 현재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다. 반면 유력시되는 것은 몇 개 있는데, 다리를 벌리고 찍은 것으로 ‘이다. 아니다’는 의견만 나오고 있다.

 외모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전부이다. 23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외증손녀 윤백영이 조모의 당의를 보관해 오다 단국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언급한 말이 있다. 황후께서는 얼굴이 갸름하시고 콧날이 오뚝하시며, 입매가 야무지시고, 눈이 가늘며, 살비듬이 흰 분이다.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있는 ‘언짢은 상’으로 제명에 못 갈 흠이라고 걱정하셨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영국의 ‘비숍여사’가 1893년에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 그녀는 4차례 황후를 알현했다. 즉, ‘황후께서는 마흔 살을 넘기신 듯했고 매우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해 꼭 진주 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다. 특히 대화에 흥미를 갖게 되면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황제와 많은 귀족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간간히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의 역량이 뛰어나고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지적인 여성이다. 이에 매료된 고종은 그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을 의논할 수 있는 정치적 동반자로 여겼다. 여성의 활동이 극히 제한됐던 시절 수렴청정이 아닌 황제의 동반자로써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국내외 정세를 보는 식견과 현명함이 뛰어난 외모의 여성으로 본다.

 대원군과 민비는 정권쟁탈로 앙숙이 됐다. 대원군이 일본낭인을 끌여들었다는 설로 1895년 8월 20일에 황후(44세)를 시해하고, 2년 후 11월 21일에 유해도 없이 양주의 홍릉에 장례 지냈다. 마침 프랑스 신부 ‘아레베크’가 장례식 과정을 찍은 사진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이 있어, 국장을 생생히 볼 수 있다. 국모를 시해한 일본은 고종이 홍릉에 자주 왕래함을 보고, 재빨리 영리를 취하기 위해,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설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07년 내린 민비의 시호가 ‘명성’이다. 이에 ‘황후’를 덧붙여 ‘명성황후’인데 일제가 비하해 ‘민비’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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