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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사춘기 지나고 오후에 짝 만나”
“점심 때 사춘기 지나고 오후에 짝 만나”
  • 김금옥
  • 승인 2015.09.02 2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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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옥 김해삼계중학교 교장
 토요일 아침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남편이 어제 저녁에 읽어준 시를 다시 읽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종종 남편에게 시들을 읽어 주곤 했지만 반응은 늘 한가지로 “응, 좋네!”로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뜻밖의 반응을 한 것이다. 가을 초입의 빛나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반칠환 씨의 ‘한평생’을 낭랑하게 읽어줬다.

 ‘요앞, 시궁창에서 부화한 하루살이는 /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 득음도 있었고 지음도 있었다 /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 두고 / 노래 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년을 산 거북이가 /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중략)’

 커피를 마시며 시를 낭독하니 두 가지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쓴 커피를 처음 마실 경우, 아이나 어른들은 물론, 실험용 쥐까지 모두 이를 기피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정 정도의 커피를 마시고 나면 그 맛과 향을 즐기게 된다. 커피의 맛과 향과 반해 좀 더 나은 커피를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시를 읽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처음에는 무슨 맛인지 막연하거나 모르는 느낌이지만 좋은 시를 여러 번 경험하게 되면 커피처럼 맛을 느끼게 되고, 시에 담긴 향기와 통찰이 가슴을 쳐, 찬탄을 하는 날도 오는 것이다. 그즈음에 이르면 좋은 시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시를 보면 필사를 하고, 시집도 사게 된다.

 문득, 한 학부형의 하소연이 생각난다. 딸의 전화하는 내용을 얼핏 듣게 됐는데 사용하는 언어도 제한적이고 비속어를 많이 사용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적을 했더니, 다들 그렇게 말한다고 도리어 억울해하며 대들었단다. 사실 요즘 청소년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또래 언어를 공유하고 싶어 한다.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비속어나 심지어 욕설까지 일부러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녀들의 언어 습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 학부형에게 올가을에 아이에게 시를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시를 읽어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숱한 언어의 조탁을 거쳐 탄생한 시는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자연스럽게 절제된 언어와 문장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줄 것이다. 비속어나 욕설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게다가 시를 암송하면 뇌의 기능과 언어 중추를 발달시키고 입과 혀를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표현력도 높아질 것이다. 시를 읽다보면 정서가 순화되고 느낌들이 체화되면서 말 자체가 품격을 지니게 되리라. 아 참, 그래서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급식소로 가는 통로에 시화 들을 여러 편 걸어 두었다. 매일 스치다보면 낯이 익을 것이고, 어느 날 시가 아이들의 가슴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에는 가족끼리 모여 앉아 시를 읽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시는 리듬이 있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각자 시를 낭송하고 그 시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야기하면서 가족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한 사랑의 향기에 취해보면 어떨까.

 어, 가만히 보니, 남편이 ‘한평생’을 필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 시 때문이었으리라.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보니, 문득 낭만적인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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