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3:46 (금)
세월을 멈추려는 슬픈 사회
세월을 멈추려는 슬픈 사회
  • 박재근 기자
  • 승인 2015.08.23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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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근 본사 전무이사
 중국의 역(易)이 동(東)으로 이동했다는 것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으로 불린 고려 말의 문신 우탁(禹倬, 1263~1342년)은 가곡원류란 시조에서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는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며 오고 가는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안 좋은 데다 노후 불안에 나이를 낮추려는 연령정정 신청이 늘고 있어 세월을 탓할 수만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호적상의 나이와 실제나이의 불일치를 고친 사례가 흔치 않았지만 이젠, 공직사회는 정년퇴직 시기를 늦추려고, 또 일각에서는 국민연금 수령 시점을 앞당기기 위한 연령 정정신청이 지난 1년 새 5.3%포인트나 늘어났다. 사회활동 때 호적상 나이가 기준이지만 실제나이와 일치하지 않는 게 허다한데도 불구하고 정년과 국민연금 수령 등을 앞둔 50대 이상이 증가하는 이유다.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감 탓에 나이를 줄여 정년퇴직을 늦추려는 공직사회와 나이를 늘려 국민연금 등을 하루라도 빨리 수령 받으려는 현상이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 지난 사례지만 경남도와 경남교육청 등 공직사회에서는 호적상의 나이를 1~3세까지 낮춘 공직자가 다수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교장과 교감 등 경남교육계의 원로들이 많게는 4살까지 낮춘 사례를 지적한 투서로 교육계가 발칵 뒤집히는 등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 정년을 연장하기 위한 사례들은 현 제도의 맹점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 있는 게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세대다. 현재 우리가 나이를 산출할 때 근거는 크게 음력생일, 또는 양력생일과 (호적)가족관계등록부 생일 등 3가지다. 호적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대개 한두 살 정도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당시 영아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제때 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고 나중에 과태료를 물지 않기 위해 실제보다 늦은 날짜로 신고하는 일이 많았던 탓이다. 이 때문에 공직사회는 부모가 늦게 신고한 나이 탓에 실제 나이가 같은 동료보다 근무기간이 길어 정년연장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등 ‘부모의 덕’을 논하기도 한다. 또 동생이 태어날 무렵 형이 죽는 바람에 동생이 형의 이름과 호적 나이를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와 뒤늦게 형 호적을 올리면서 동생의 호적상 연령을 앞당긴 경우 등 실제나이보다 많은 사례도 있다.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의 불일치가 개인의 삶에 중요한 장애요인이 된다면 나중에라도 바로잡는 것이 맞다. 취학, 취업 등 연령을 제한하는 것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탓인지 삶에 잣대에 맞춰 연령을 낮추는 현상이라 서글픈 면이 없지 않다.

 과거 나이를 중시 할 때 동년배들에게 후배 취급을 받아 나이를 고친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은 국민(노령)연금, 정년 연장 등 혜택을 보기 위해 연령정정을 낮추는 추세다. 50대 이상이지만 같은 50대라도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 연령을 낮추거나 높이려 것도 특징이다. 공무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정년 연장 등을 노려 연령을 낮추려 한다면 반대로 저소득층은 국민연금이나 노령연금을 빨리 받기 위해 높이려는 현상이다. 호적상 연령을 정정할 경우 국민연금 수급조건(10년 이상 연금보험료 납부)만 충족되면 연금 개시 연령이 앞당겨진다.

 반면 호적상 나이가 달라졌다고 해도 정년 연장은 쉽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관련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내년부터는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60세 정년을 의무화하는 고령자고용촉진법이 시행돼 동일한 생년월일이라도 음력과 양력 중 어떤 날짜를 호적에 올리느냐에 따라 정년퇴직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제도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한두 살 나이를 줄여 정년을 5년 이상 늘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법원으로부터 나이 정정 허가를 받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으로 반드시 정년 연장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공직과는 달리, 일반직장의 경우, 입사 때의 생년월일을 정년 기준으로 삼기때문이다.

 나이가 웬수인지,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안 좋은 데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후 불안 심리가 커지면서 연령정정 신청이 늘어나는 것은 정년에 의한 기대 수익을 감안,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연령을 정정하려는 현상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장 큰 배경이라지만 다산 정약용은 백발(白髮)이란 시에서 ‘백발을 다시 검게 만들 수 있다 해도 마음이 이미 말라 버렸으니 다시 꽃피기 어렵다’고 했다.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몸은 늙었어도 머리 검은 것보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그런 사회를 기대해도 시원찮은 시대에 연령을 낮추거나 높이려는 슬픈사회라니,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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