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나 한자나 엄밀히 말해서 다 외국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쭈욱 ‘한글전용’에 힘을 써왔다. 1945년 9월 조선어학회가 국어 교과서를 지어 미 군정청 학무국에 줬고, 학무국은 그해 12월 교과서에서 ‘한자는 없애고 모든 글은 가로쓰기’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엔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고 오랜 갑론을박 끝에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 ‘한글전용’의 원칙이 세워졌다. 초등학교 교과서가 한글로만 나온 것은 이때부터다. 1975년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힘을 얻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병기가 재개됐지만 이내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일간신문에서 한자 표기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중고교 교과서에서도 2000년대부터는 한자가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대학교재에서도 한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세월은 흐르고 외래어가 대세인 시대다. 대기업과 정부 산하기관까지 영어이름으로 개명하고 온통 영어약자로 된 회사이름이 널렸다. 조사만 빼면 영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또한 읽기로는 분명 한글이지만, 사실은 한자어인 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상황인데도 2015교육과정 개정안에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를 포함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글지킴이를 자처하는 이들은 한자교육 활성화를 위해 한글 죽이기 정책을 펴고 있다고 걱정이다. 그런데 그보다 큰 걱정은 우리 아이들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이미 많은 한자자격시험은 종류가 더 많아질 것이고 관련 사교육 시장이 요동칠 것이라는 예측이다. 아이들은 한자공부를 재미있어 즐기는 것이 아니기에 한자 사교육에 억눌려서 신음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어차피 공부에 반평생을 보내는 우리다. 솔직히 영어에만도 거의 십수 년을 바치는데, 중국어도 아니고 한자 익히는데 시간 좀 쓴다고 손해 볼 것은 없다. 공부한 만큼 이익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에 있다. 우리 아이들이 한글도 제대로 배울 시간이 모자라고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데 있다. 절대 시간으로 워낙 많은 종류의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글을 제대로 배우는데 시간 할애를 못한다. 또 영어나 한자를 많이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쪽 문화에 젖어든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한글을 제대로 알고 쓸 줄 안다면 영어든 한자든 스페인어든 다양하게 배울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뿌리를 놓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영국인, 미국인이 아니다. 한자 또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중국 사람이 될 수 없다.
보수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이것은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재앙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재앙이다.
말을 잃으면 영혼도 잃는다. 일본어 병기 하자는 말은 아닌데도, 어쩐지 광복 70년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한자 병기 운운하기 전에 우리말 교육부터 제대로 챙기는 것이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