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3:02 (목)
인성교육 첫 걸음, 자신 찾기
인성교육 첫 걸음, 자신 찾기
  • 한중기
  • 승인 2015.08.17 2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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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기 두류인성교육연구소 소장
고운 최치원부터 빨치산까지 다녀간 대성골 거닐면서
더불어 사는 삶ㆍ 타인 배려ㆍ존중감 등 배우는 이정표 바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지난 14일 ‘서산대사 길’을 따라 지리산 깊은 곳까지 종일 걸었다. 고운 최치원이 세속의 더러워진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세이암. 그가 그랬듯 잠시 청량한 계곡물에 귀를 씻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 다음 스마트 폰도 ‘오프’하고 산으로 빠져 들었다. 선유동, 단천골, 대성골, 큰세개골을 지나야 지리산 주능선이 나오는 여정이다. 화개동천 깊숙한 곳 대성골은 현대사의 질곡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천년전 고운이 들어온 이후 숱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빨치산의 본거지에 이르기까지 역사 문화 사회적으로 매우 뜻 깊은 곳이다. 결코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아무리 귀 씻고, 눈 씻어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상흔들이 아른거리는 길이기에 그렇다.

 의신마을 원통암에서 출가한 이후 대성골, 영신봉 자락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를 걸었던 서산대사의 길은 어땠을까.

 ‘눈 덮인 들판 어지러이 걷지 마라 /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 뒷사람의 이정표되리니.’

 백범 김구의 애송시로도 유명하고, 공식적으로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의 문집에 있는 글이지만, 서산의 선시로 더 알려진 탓에 ‘서산대사 길’을 들어서는 순간 맨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 시의 내용처럼 누군가 한번 잘못 걷게 되면 훗날 어떻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이 아이러니에 잠시 발길이 멈춰진다. 어미 잃은 야생 거위 알을 집으로 가져와 부화시켰더니 맨 처음 눈을 맞춘 주인공 에이미를 엄마로 알고 졸졸 따라 다니는 거위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름다운 비행’의 한 장면도 떠오른다. 동물행동학자인 로렌츠 박사의 ‘각인효과’를 모티브로 한 영화지만, 첫 걸음의 중요성은 동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깊은 산길에서 느껴봄도 등산의 색다른 맛이다.

 대성마을 가는 길가에 마치 전위예술 하듯 이어지는 소나무와 서어나무 또는 소나무와 소나무, 서어나무와 서어나무의 연리지, 연리목 행렬은 더불어 사는 삶과 포용의 미학을 전해주는 듯하다. 특히 숲의 천이과정에서 가장 처절한 생존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는 소나무와 서어나무는 앙숙관계임에도 밑동을 한참이나 함께 맞붙인 채 다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두 나무의 연리목이 주는 메시지는 감동적이다.

 그런가 하면 서산이 정진한 옛 대승사 터를 지나 대성골 깊은 골로 들어갈수록 산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어느 순간 전혀 힘들지 않고 마치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든다. 마라톤을 하면서 간혹 맛보는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경험이다. 내가 산에 들어갔는지, 산이 내게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의 몰입에 빠져본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 듯,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듯’ 한 순간이랄까. 아니다. 서산대사의 ‘삼몽사’가 생각난다.

 ‘주인이 손님에게 꿈 이야기하고 / 손님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 하네 / 지금 꿈 이야기하는 두 사람 / 역시 꿈속 사람들이네.’

 길을 가다 주막집에서 쉬던 중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간밤의 꿈 해몽이야기를 듣고 지었다는 서산의 선시를 떠올리면서 산행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작은 행복이다.

 ‘산을 보고 물을 보며, 그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을 보고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본다’는 남명 조식의 명언이 새삼 와 닿는다. ‘서산대사 길’을 걸으면서 그 곳에 남겨진 선지식의 발자취와 민초들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값진 걸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실, 인성교육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다.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이해, 즉 내면세계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인성교육의 시작이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성찰해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창조적인 삶을 살고 멋지게 죽을 것인가’라는 인문학의 기본적인 가치를 인식하면서 자신을 찾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의 주어진 위치에서, 오늘 한 걸음걸이가 훗날 이정표 된다는 큰 의미를 새기면서 늘 경계하는 삶이 됐으면 한다. 서산대사가 걸었던 길에서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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