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20:42 (목)
늦깎이 학우의 행복
늦깎이 학우의 행복
  • 김민창
  • 승인 2015.08.06 2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민창 진주향토시민학교
‘누군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걸어가고 있겠지’하고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딸 아이 둘을 데리고 진주시에 있는 예술회관 앞으로 나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늦깎이 제자들을 기다리며 수험표와 도시락과 OMR 카드 사인펜을 챙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분, 두 분 약속한 장소로 모이십니다. 제자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배움에 한이 됐던 지난날의 시간들이 저의 마음에 스쳐 지나갑니다. 안타까움보다도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싶은 스승의 마음이지만 무어라고 표현하지도 않은 채 수험표와 OMR 카드 사인펜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동안 숱한 시간들을 배움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며 3시간 20분 동안 쉬지도 않으시고 강의를 듣고 계셨던 위대한 제자들은 그렇게 창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고 고사장으로 향하는 늦깎이 제자들의 심정을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현장에서 피나는 노력과 열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야학의 선생님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시험장에 향할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지칠 법도 한데 지치지 않는 이유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길을 벗어나기 위해 들어오지 않는 학문을 한 번 두 번 아니 백 번 이상을 펼쳐 보며 공부하셨던 제자들의 심정을 알기에 무더운 이 여름날 검정고시 시험장은 희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야 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니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 학생들의 틈에서 힘들게 시험을 쳐야만 하는지 회의감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 젊은 학생들이 검정고시에 응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쳐 드리는 제자들은 항상 늦깎이 연세 드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현 제도하에서 배움을 통해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는 길은 검정고시를 통한 길입니다. 왜 제가 이 길을 고집할까요? 이 길이 어쩌면 늦깎이 학우들이 열심히 하셔서 빨리 졸업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졸업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배워야 한다는 신념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96년부터 시작된 이 길은 제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하면 별로 없다고 생각하겠죠. 아닙니다. 아직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사회가 이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의 한을 느껴 보았습니까? 아마도 이 고통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함께 한 20년의 야학 생활 동안 눈물 흘리며 보았던 것은 이 사람들의 한을 누구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수수방관하며 이들을 감싸주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말 못하는 배움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이번 검정고시 시험에서도 천 명이 넘는 수험생들이 제각기 사연을 안고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고사장을 찾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창원을 향해 먼 곳에서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떨어져 다시 큰 시름에 빠져 있는 수험생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나 시설의 부족해 독학으로 시험장에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사회가 이들을 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또 누군가는 낙오자가 돼 밤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천에서 삼천포에서 의령에서 하동에서 산청에서 함양에서 거창에서 이곳까지 배움을 오시는 이유는 그곳에는 늦깎이 학우들을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 논리가 지배적인 사회구조 속에서는 늦깎이 학우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육복지는 경제논리가 아닌 형평성의 문제로 생각해 어디에서나 배울 수 있는 시설이나 공간이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온 수십 년의 노정이 힘들어 눈물로 지새웠던 밤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 먼 길을 오셨다는 것을 알기에 멈출 수 없는 이 길을 걸어 왔습니다. 천명이 넘는 늦깎이 학우들을 만나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지식은 극히 적은 것이었습니다. 전 이분들께 지식보다도 더 큰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열심히 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최고령 제자도 이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번 검정고시에서 의령에서 오신 제자도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사천에서 오신 제자도 고졸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됐습니다. 고통이 지나면 기쁨이 온다는 말처럼 오늘도 제자들을 보면서 슬픔도 기쁨도 함께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