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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 떠나는 ‘위대한 항해’
한여름 밤 떠나는 ‘위대한 항해’
  • 김금옥
  • 승인 2015.08.05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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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옥 김해삼계중학교 교장
 “배는 천천히 파괴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천만 t의 얼음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압력이 배의 양측을 조이고 있었고, 배는 죽어가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여름 밤을 좀 시원하게 보낼 양으로 집어든 책이 알프레드 랜싱의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였다. 1914년 섀클턴(Ernest Shackleton)은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목제 범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탐험을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남극대륙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웨들해에 들어서는 순간, 표류하는 얼음 덩어리들(부빙)이 배의 중앙부를 공격하고 뱃머리를 에워싸 결국, 인듀어런스호는 파손돼 침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배에서 내려 얼음 덩어리 위로 캠프를 옮겨 세운다.

 섀클턴은 1999년 말 영국 BBC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지난 1천년 동안 최고의 탐험가 10인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제임스 쿡, 닐 암스트롱, 마르코폴로에 이어 5위에 랭크되기도 했던 인물이면서, 신(神)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는 리더이다.

 남극대륙 탐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섀클턴은 전 대원들의 무사생환을 목표로 수정한다. 그는 부빙 위에서 허기와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혹한의 바다와 싸우는 634일간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모든 대원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이끈 전설적인 리더가 된다. 이 책이 50여 년 전에 출간돼 지금도 미국과 전 유럽의 경영자들에게 인기리에 읽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필자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섀클턴뿐만 아니라 대원들도 한결같이 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저자 알프레드 랜싱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특히 탐험대원들의 상세한 일기가 중요한 자료가 됐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서 그토록 꼼꼼하게 일기를 쓸 수 있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배가 침몰하던 날에도 섀클턴 대장은 “도저히 더 쓸 수가 없다”고 썼던 것이다. 배가 가라앉고 나자, 워슬리 선장은 “잔인한 얼음에 항복하기 전까지 그 어떤 배도 할 수 없을 만큼 용감하게 싸웠다”고 적으며 배를 애도했다. 그들은 종이가 모자라 회계장부 여백이나 아주 작은 노트에 깨알처럼 적었다.

 흔들리는 얼음 덩어리 위에서의 캠프 생활 동안 생존을 위해 펭귄이나 물개사냥도 하고 종기가 나고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잘려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고통에 짓눌렸지만 불평불만과 타협하지 않았다. 자석같이 끌리는 매력을 가진 리더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이 있었고 즐거웠으며 힘이 넘쳤다”고 적고 있다.

 책은 필자를 남극의 얼음덩어리 위에 둥둥 띄워줬다. 지나치게 시원한 밤을 보냈다는 느낌 속에서도 가슴이 뜨거웠던 이유는, 인듀어런스호가 침몰하고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짐을 버리고 줄이기를 반복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가져가도록 허락된 것이 대원들의 일기장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식량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건들을 챙기면서 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일기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이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항해 일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서인도 항로를 발견한 콜럼버스나 난중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태어난 과정에는 섀클턴 대장 외에 그 배에 탔던 대원들도 한결같이 일기를 써서 리더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전쟁이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일기를 쓰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위태로운 삶의 순간에 그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종이가 인간의 수명보다 더 오래 견디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매일 한두 줄이라도 일기를 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 배를 띄우는 일은 꿈도 못 꾸는 일상이지만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때 일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들고 가도록 허락될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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