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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출신 김영춘 ‘홍도야 우지마라’
김해출신 김영춘 ‘홍도야 우지마라’
  • 송종복
  • 승인 2015.08.03 2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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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 (중략)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 (중략) 홍도야 우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 (중략)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오리라.’

 이 노래는 김영춘이 20세(1940년) 때 부른 노래며 본명은 김종재(1918-2006)다. 그는 김해 어방동 471번지에서 태어나 김해동광보통학교와 김해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동척의 사감(舍監) 치하에서 장래가 암울하자 상경했다. 그가 취입한 노래는 30여 곡이나 돼도 ‘홍도야 우지마라’는 곡이 대히트를 치자, 나머지 곡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왜 ‘오빠가 있다’고 했을까. 홍도 덕분에 출세한 오빠(철수)가 결국에는 홍도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흐느껴 우는 홍도에게 ‘우지마라’고 한 것은 변론의 여지가 있다는 뉘앙스다. 일제치하에서 홀아버지가 죽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방황하는 오빠(철수)를 위해 부잣집 아들 영호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고 결혼까지 했다. 그로 인해 나온 돈으로 오빠의 학비를 댔다. 여동생의 도움으로 공부한 오빠(철수)는 관직(판ㆍ검사직)에 오른다.

 한편, 홍도는 시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광호에게 시집을 간다. 그로부터 받은 ‘알바비’로 오빠를 공부시킨다. 시가에서 자식 하나를 얻어 오직 자식에 대한 사랑과 유학 간 남편(광호)을 위해 모든 수모와 멸시를 감수하고 시집살이를 한다. 북경에 있는 남편과 오가는 편지도 중간에서 편취하고는 온갖 음모로 홍도를 쫓아낸다. 더구나 남편의 첫사랑인 혜숙이도 남편(광호)과 재결합을 위해 홍도를 가난과 기생으로 내몰자 궁지에 빠진 홍도는 정신이 돌아 순식간에 칼을 휘둘러 남편의 애인 혜숙이를 살인한다. 마침 살인현장에 경찰관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오빠 홍도였다.

 이때 수갑을 채우자 홍도도 울었고, 오빠도 울었다. 살인범으로 처벌을 받더라도 현장에 간 오빠가 변론을 할 것이니 ‘홍도야 우지마라’고 위로하는 눈치가 엿보인다. 1938년 법정에 선 홍도가 오빠의 변론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는 후속편이 제작됐다. 그로 인해 인기가 폭발하는 연극이 됐고 그 뒤 레코드가 10만 장이나 팔렸고 극장마다 만원이되는 시대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이를 본 기생이 한강에 투신한 이도 있었다.

 원래는 남일연이 부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인데, 1940년에 김영춘이 노래 뒷면에 ‘홍도야 우리마라 오빠가 있다’라고 불렸다. 이 곡이 대히트 되자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다. 1950년대 박재홍이 ‘홍도야 우지마라’ 고 다시 취입해 히트곡이 됐다.이는 ‘슬픈 홍도’가 민족의 표상으로 각인된것을 뜻한다. 1970년대는 라디오 드라마가 제작돼 방송되기도 했다. 이 극은 한 많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과 화류계 여성들의 처지를 대변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는 당시의 결혼 풍습에 문제가 있었음을 풍자하고 사랑보다는 지위와 신분을 따지는 상황을 비판했다.

 또한 홍도는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홍도의 순정을 깨닫게 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다. 이 홍도의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김해 태생의 가수라는 것을 시민들은 얼마나 알아줄까. 경기도 시흥에는 광복 50주년(1995)을 맞아 ‘홍도야 우지마라’의 노래비를 세웠다. 이유는 작사의 출신지라는 것이다. 반면 이 노래를 부른 김해 출신 김영춘의 영혼은 한없이 외롭고 쓸쓸히 떠돌아다닐 것이다. 어서 바삐 그의 가요비를 김해의 중앙인 연지공원에 세워 그의 혼을 달래주며, 일제의 잔학상과 민족의 비애를 자라는 세대에게 산 교육장으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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