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懲毖錄(징비록)
懲毖錄(징비록)
  • 송종복
  • 승인 2015.07.08 2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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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懲-징계하다 毖-경계하다 錄- 기록하다

 ‘징비록’은 지나간 일의 잘잘못을 되새겨 닥쳐올 환란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시경에 있는 글귀다. 이전의 잘못을 꾸짖어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훈계조로 말하는 것이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임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하고 전쟁을 지휘했던 유성룡(1542∼1607)이 난후에 경험한 사실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저술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선조실록>, <임진장초>, <용사일기> 등이 있지만 이만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은 없다.

 이 책은 외손 조수익이 경상도관찰사(인조 25. 1647년)로 있을 때 간행했다. 내용에는 임란이 일어난 뒤의 기사도 일부분 차지한다. 임란이전의 대일관계에 대해서도 대충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란의 단초(端初: 실마리나 배경)를 소상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즉, 장계(狀啓)로 관찰사나 왕의 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 소차(疏箚)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문이(文移)로 상급 관청과 하급 관서 사이에 오가는 공문 및 잡록(雜錄)을 첨부했다.

 유성룡은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의 제자로서 ‘정승의 대명사’인 황희, 이원익, 채제공, 김육과 더불어 조선의 5대 명재상이다. 조선은 문인의 나라로 출판서적들이 많다. 그 중에도 가치 있는 책은 ‘징비록’으로 본다. 왜란 중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이다. 오늘날 진정한 우방은 찾아 볼 수 없고,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난세에 봉착한 우리에게는 이 책이 필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다. 외교적인 수단과 군비만 강화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다.

 당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 3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다. 즉, 한 사람의 정세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는 것을 경계하라. 지도자가 군사(안보)를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과 같다. 유사시 도와줄 믿을만한 후원국(동맹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혹자는 당쟁으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는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임란발발 10년 전부터 많은 전쟁의 징조가 엿보였다. 타조는 적이 쳐들어오면 도망가거나 덤벼들어 싸울 생각은 않고, 그 대신 움푹한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아 넣는다고 한다. 이유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애써 잊어버리는 편을 택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선조들이 임진왜란 직전에 보여 주었던 행위가 ‘타조’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하겠다.

 지금도 나라주위에는 곧 전쟁이 일어날 듯이 신경을 세우고 있다. 원래 전쟁이란 외교의 마지막 수단이다. 외교가 두절되면 곧 전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 어떤 전쟁도 혼자서는 치를 수 없다는 진리를 부디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징비록’을 통해 보아 사전의 정보와 우방간의 외교와 막강한 무기와 정신적 훈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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