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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와 다산 정약용
손학규와 다산 정약용
  • 박태홍
  • 승인 2015.05.18 2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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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국민들이 기댈만한 곳이 없다. 청와대 정부 여ㆍ야 모두 그렇다.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모를 럭비공과 같은 현실이 오늘날 이 나라의 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 연금개혁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고 하는 반면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다”며 한술 더 뜬다.

 이는 청와대와 여당의 불협화음이 표면화되고 있는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계속돼 온 오늘날의 정치현실이라 할 수 있다. 국민들과 가장 가깝게 있어야 할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도 여당과 청와대와 다를 바 없다. 정치권 모두가 우리들이 가야 할 미래에 대한 구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당의 독주를 다소나마 견제해야 할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4ㆍ29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안방격인 광주까지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정배 의원에게 내줬다. 이는 안방마님이 대대로 지켜 내려오던 곳간열쇠를 작은집 마님에게 내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때문에 재보궐선거의 참패에 따른 책임론이 대두되면서 당내 기류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주승용, 정청래 최고위원 간의 말싸움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당 쇄신을 위한 애당차원의 최고위원회의에서 일어난 돌발사건이었지만 이는 현재 야당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행태여서 국민들은 더욱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현실이 이러다 보니 모 종편에서는 느닷없이 칩거 중인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상임고문을 찾아, 취재, 특종이라며 방송을 내보냈다.

 손 고문의 방송출연이 이례적이기도 하지만 시기적으로 모호해 국민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릴 뿐이다.

 손학규 고문은 2014년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 출마, 새누리당 의원에게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강진으로 칩거한 상태다.

 손 고문은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젊은 나이에 3선 국회의원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거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까지 치른 명망 있는 정치지도자다.

 1993년 민자당(한나라당전신)에 입당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까지 지낸 사람이 2007년 한나라당을 결별하고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당적을 바꾼 전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정동영 후보에게 패한 후 손 고문은 우리나라의 복지형태에 대해 잔여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면서 2008년 7월 강원도 춘천으로 칩거했다.

 2010년 민주당 대표로 돌아왔지만 야당지도자로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지난해 재보궐선거에서 떨어진 후 전남강진으로 두 번째 칩거에 들어간 셈이다. 여기서 괄목할 것은 손 고문이 다산 정약용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관직 생활 18년 유배 생활 18년 유배에서 향리로 돌아와 생을 마치기 전까지의 18년 제자 18명을 들먹이며 18이라는 숫자에 의문부호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다.

 다산은 학문연구와 더불어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치세기였던 시절에 관직에 나서긴 했지만 그 당시 정3품의 벼슬인 형조참의를 끝으로 물러났다. 형조참의 위로는 형조판서와 형조참판이 있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법무부의 서열 3위에 해당되는 법무부의 차관보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다산은 조선 시대에 직면해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었던 실학사상을 고수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인 성호학파의 경학적 기초위에서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학문풍토를 계승한 위대한 실천적 인물로 후세에 평가받고 있다.

 토지의 공유와 균등분배를 통해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기조하는 그의 경제사상이나 인정과 덕치를 통한 민본주의적 왕도정치를 중핵으로 삼는 사상을 기본적으로 하는 성호 이익의 실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게다가 유배 18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며 개혁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단지 손 고문과 다산의 삶의 궤적이 일치하는 것은 정치가, 행정가였으며 유배지와 칩거지가 강진이었다는 것 외 연상되는 부문은 별로 없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 종편에서는 손 고문의 정치 복귀를 부추기는 듯한 방송을 내보내며 다산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왜일까? 그 회답을 정치권 모두가 스스로 찾아야 할 이 시대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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