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2:09 (금)
한 마리 하얀 새가 되어
한 마리 하얀 새가 되어
  • 이주옥
  • 승인 2015.05.07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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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엄숙한 자세로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들어섰다. 시골에서 상경하신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잠든 외삼촌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정문을 지키는 헌병의 바지선이 유난히 반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헌병은 그보다 더 반듯한 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6월의 현충원은 푸름이 지천이었다. 흐드러진 이팝 꽃이 흰 눈송이처럼 얹혀 있었다.

 그곳에 잠드신 분은 어머니의 여섯 남매 중 바로 아래 동생이자 외가의 장남이었다. 살아계시면 낼모레가 팔순이다. 가난을 피해 보려고 월남전에 파병을 자원했다. 그때 삼촌 나이 스물네 살, 우리나라 최초 파병부대인 비둘기부대의 소속원이었다. 그런데 전역을 일주일 앞두고 지뢰 사고로 전사했다.

 “오메, 급하게 오느라 우리 용수 꽃 한 다발도 못 사 왔네.”

 아버지와 세 자매가 함께했건만,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 말고는 어느 누구도 묘비 앞에 놓을 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재빠르게 차에서 내려 하얀 이팝 꽃과 빛바랜 진달래를 꺾어 조그마한 꽃다발을 만드셨다. 늘 차분하기만 하던 어머니의 얼굴에 붉은 물이 오르고 한 손으로는 내려가는 바지춤을 물색없이 부여잡았다. 묘비구역 번호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동생의 묘를 정확히 찾은 것에 안도하면서 어머니는 차가운 비석을 쓸어내렸다. 처연한 그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무용담의 주인공처럼 간간이 이름만 들었던 삼촌의 존재와 그곳은,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낯선 이름, 낯선 관계, 낯선 공간이었다.

 별말씀 없던 아버지가 침통한 표정으로 처남에게 술 한 잔 따르셨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누이를 못 잊어서, 품팔이하고 받은 먹거리를 슬그머니 대문 앞에 놓아두고 갔던 사려 깊은 처남.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보다 더 곤고(困苦)했던 아버지의 삶. 끼니 걱정해 준 듬직한 처남에게 아버지 심중엔 내심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하찮은 들꽃도 피면 요로코롬 이삔디, 시상에 그 젊은 나이에 펴보지도 못하고…. 그때 뒷집 옥자랑 알콩달콩 지낼 때 모른 척 눈감아줄 걸, 내가 무담씨 엄니한테 고자질해서 훼방을 놔부럿어.”

 그곳에 누워계신 호국영령들은 누구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겠지만 반백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외삼촌을 찾으시는 8순 넘은 어머니에게 그런 애틋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머니의 가슴 절절한 넋두리가 바람에 섞여 날아다니는 동안,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묘비에 적힌 이름들을 읽었다.

 ‘저 사람은 누구의 아들이었을까?’, ‘저 남자도 누구의 연인이었겠지’ 엎어져 흙이 묻은 화병들을 일으켜 세우고, 빠져나가 흐트러진 조화를 다시 꽂았다. 그 때 한 톤 높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메, 우리 용순 갑다. 내가 처음 여기 들어올 때부터 계속 나를 따라 댕기드랑께.”

 어머니의 머리 위, 아니 삼촌의 묘지 위를 하얀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어머니는 과자 부스러기를 꺼내서, 머리 위를 뱅뱅거리는 새를 향해 정신없이 던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대는 새가 그 순간엔 저승에서 이승으로 현신한 용수삼촌이었다. 해마다 거의 빠짐없이 다녀가는 곳이지만 진짜로 용수삼촌이 살아난 것처럼 어머니 얼굴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새는 우리들 머리 위를 날았다가 우리 곁에 앉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한참을 그저 침묵하며 앉아 있었다. 새가 날아가지 않는 한 돌아가면 안 되는 것처럼.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어머니의 눈은 자꾸 새를 쫓았다. 그리고 읊조림은 계속됐다.

 “저 새는 분명 우리 용수였어.”

 “그래요 엄마, 그 새는 분명히 삼촌이었어요.”

 우리들도 어머니의 말씀에 동조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새가 삼촌의 영령이었기를. 내년에도 그 새가 삼촌이 돼 다시 날아오기를.

 이제 또다시 유월이 오고 있다. 어머니는 하얀 새가 돼 날아올 삼촌을 만나기 위해 벌써부터 가슴에 따뜻한 둥지 하나를 만들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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