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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래공수거
공수래공수거
  • 정창훈
  • 승인 2015.04.26 2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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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시인ㆍ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재물을 모으려고 욕심내지 말라”는 6백여 년 전의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현대사회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나옹선사는 어떤 사람인가? 고려 공민왕 때 고승이며 영덕 출신이다. 스무 살 때 친구가 갑자기 죽자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며 불가의 문을 두드리게 됐고, 스물네 살 때 원나라 연경(현재 북경)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선사의 지도를 받고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해 왕사가 됐다.

 공수래공수거는 석가모니가 창시한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석가모니는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중생을 교화하는 등 불후의 업적을 남기고 열반에 든다. 분명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인류를 위해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 의미와 가치를 남기고 떠났음에 틀림없다.

 지난 1월 23일(현지시간)사우디 국왕이 20여 년간의 집권을 접고 세상을 떠났다. 총리직과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손에 쥐고 이슬람 성직까지 장악하고, 힘의 중심에 있었던 그도 결국 폐렴 하나 이기지 못한 채 세월 앞에 손을 들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타계하자 사우디 왕실은 당일 오후 애도 예배 형식의 간소한 장례식을 치른 뒤 수도 리야드에 있는 알오드 공동묘지에 묘비도 남기지 않고 시신을 안장했다. 시신은 관도 없이 흰 천만 한 장 둘렀고 묘소에는 뗏장을 입힌 봉분을 올리는 대신 흙바닥에 얕게 자갈을 깔아 간신히 무덤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여러 국영기업을 소유해 자산 규모가 170억 달러(약 18조 4천억 원)에 달하는 압둘라 국왕의 마지막이 이처럼 소박한 것은 사우디의 지배 이념인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와하비즘) 지침을 따른 결과라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와하비즘 교리는 사치스러운 장례 행사를 우상 숭배에 가까운 죄악으로 간주해 국왕이 서거해도 공식적인 애도 기간을 두거나 추모 집회를 여는 일이 없다.

 “난 죽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싶소.”

 이 말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로 남은 피카소가 남긴 말이다.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그는 죽음을 뚫어지게 응시했듯, 삶도 그렇게 자아의 한계를 넘어섰다. 삶을 응시하는 일은 죽음을 응시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는 죽음이 두렵다는 나의 말을 정정한다. 나는 삶이 더 두렵다. 세상에 타협하는 나의 한계가 두렵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삶이 더 두렵다고 했다.

 나옹선사의 선시에서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세상에서 물처럼 바람처럼 모든 탐욕을 버리라는 무소유의 넉넉함을 느끼지 않는가?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살아오면서 향유했던 부와 명예,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사람과 똑같이 양손을 같은 모습으로 펼치고 있다. 인생사 공수래공수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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