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9:41 (토)
단팥빵 사랑
단팥빵 사랑
  • 김혜란
  • 승인 2015.04.15 1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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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ㆍ소통과 힐링센터 소장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길모퉁이 동네 빵집에서 빵을 한 아름씩 사오셨다. 사 남매가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 부은 봉투에는 단팥빵, 소보로, 크림빵에 카스텔라 등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기호가 달라 싸우지 않고 나눠 먹었지만 언제나 먹어도 물리지 않았던 빵은 단팥빵이었다. 갈색 윤기 나는 동그란 섬 같았던 빵 껍질부터 마음에 들었다. 한 입 베어 물면 얇은 껍질 너머 부드러운 밀가루 빵 속살과 국산 단팥을 며칠씩 고아 만든 단팥소의 오묘한 질감이 행복한 유년의 추억을 만들어 줬다.

 최근 마트나 백화점 빵 코너에 가면 항상 특제 단팥빵을 만난다.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요즘 나오는 빵들의 지나치게 화려한(?) 빵 맛에 물린 입을 달래기 위해 향수에 젖은 단팥빵을 사서 먹어본다. 찹쌀을 더 넣은 빵의 보드라운 질감, 중국산 팥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던 단팥의 국산화 등으로 맛이 놀랍도록 고급화됐다. 그렇지만 값이 너무 비싸다. 보통 일반제과점의 보통 단팥빵이 1천원 정도라면, 이 특제 단팥빵들은 1천500원에서 심지어 4천원까지 한다. 서울 어느 곳에는 더 비싸다는 말도 들린다. 입맛 한번 찾기 비싸졌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나 재료와 맛에 경쟁력을 갖춘 곳은 줄을 선다. 그 중에서도 단팥빵을 고가전략으로 특화시킨 곳이 특급호텔이다. 시중가격보다 두 배 세 배 비싼 값으로 팔지만 줄을 서서 사 먹는 것이다. 지역의 마트나 백화점에는 빵 전문 프랜차이즈뿐만 아니라 호텔이름을 단 직영제과점이 들어와 있는 곳이 많다.

 요즘 젊은이들은 밥을 덜 먹는 대신 빵을 많이 먹는다. 빵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좋아한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는 전국의 맛있는 빵집을 찾아다니는 무리들도 많다고 한다. 이른바 ‘빵 로드’도 있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하필 왜 단팥빵으로 제과점들이 경쟁을 벌이는 것일까. 근래 만들어진 빵은 그다지 입에 맞지 않는 중년 여성의 입맛을 끌어보자는 의도가 아닐까. 어쩌면 남녀상관 없이, 어린 날 단팥빵의 달콤한 추억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빵의 나라로 모시려는 작업일지도 모를 일이다.

 혀처럼 예민한 신체의 일부도 없다. 오감 중 미각을 사로잡은 것들은 오래돼도 잊혀 지지 않는다. 어린 날 먹었던 음식 맛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에는 옛날의 어느 한순간, 행복했던 순간을 지금 불러오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고달픈 삶에 위안과 위로를 받고 싶은 절실함은 때로는 입맛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힘에 기대기도 한다.

 그런데 이 특제 단팥빵을 백화점이나 프랜차이즈점이 아니라 동네 빵집에서 좀 싸게 사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과욕일까.

 실제로 2005년까지 동네빵집이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의 4배에 달했지만 지금은 역전됐다고 한다. 10년 새 그 많던 동네빵집은 사라졌고 보이는 것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이다. 2013년부터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제과점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올해까지 대기업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점포 수 확장 및 시장 진입자제를 권고받았다. 동네빵집은 주어진 기회에 총력을 다 하고 있지만 자리 잡는 동네빵집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내년이 되면 다시 대기업 프랜차이즈점들은 시장을 향해 진격해 올 것이라 한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에 밀려 사라져 가는 동네빵집은 무너져가는 서민경제의 닮은꼴이다. 단팥빵만큼은 동네빵집에서만 팔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 싶은데,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시장경쟁 체제가 야속할 때가 이런 때다.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기에는 가시밭길인 동네빵집이지만 꿋꿋이 살아남아서, 싸고 맛난 특제 단팥빵을 내놓을 수 있는 그날이 대한민국 서민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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