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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택시 어디 가고 외제차만 판치는지
시발택시 어디 가고 외제차만 판치는지
  • 송종복
  • 승인 2015.03.30 2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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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회장
 우리나라 최초의 차(車) 이름은 1955년 8월에 생산된 ‘시발택시’이다. 이 ‘시발(始發)’은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시발’의 첫 글자를 된소리로 발음하면 욕설이 되니까, 경남매일 애독자님께서는 조심해서 발음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시발택시’를 구입하기 위해 ‘시발계(始發契)’까지 생겨났다. 우리나라 자동차의 첫 기록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교수가 쓴 ‘버튼 홈즈 여행기’에 차의 그림이나 사진이 있다. 그는 1901년 차를 빌려 타고 서대문 근처에서 소달구지와 충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그 이전에도 서양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들여온 자동차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자동차는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의전용으로 들어온 ‘포드 A형 리무진’이다. 2인승이었던 포드는 소음이 심해 황제의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이용하지 않았고 궁궐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차체는 목재이고 차문은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내부는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고, 형태는 마차와 비슷하고 시속은 30㎞를 낼 수 있었다. 이 차는 전 세계에 3대 있으며, 국내 것은 복원돼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2005년에 문화재로 등록됐다.

 1911년의 보유대수는 황실용 2대와 총독부 1대이다. 이후 부유층의 자가용과 운수사업용으로 1945년에는 7천386대로 보유대수가 늘어났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는 6ㆍ25전쟁 후 미군용 지프차를 재생하는 하동환공업사와 신진공업사가 생겨났고, 1955년 8월에 국제차량공업사의 최무성 삼형제가 수공업형태로 지프형 승용차 ‘시발택시’로 만들었다. 이 택시는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 엔진과 변속기에 드럼통을 두들겨 펴서 만든 차체를 조립한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소원은 ‘시발택시 한 번 타보는 게 소원’이라 했고 차만 보면 ‘시발차’라고 했다.

 1955년 광복 10주년을 맞이해 10월에 경복궁의 산업박람회 때 ‘시발택시’를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에 부유층에서 구매 붐이 일어나 가격도 8만 환에서 30만 환으로 껑충 뛰었다. 한 달도 못돼 1억 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공장시설도 제대로 갖춰 양산 체제로 돌입했다. 얼마 후 ‘시발투기 붐’까지 일어나 부자들은 ‘시발계’(始發契)’까지 생겨 ‘프리미엄’을 얹어 전매하곤 했다.

 1962년 8월 유행가 중에 ‘낙동강 700리에 공글(콘크리트)다리 놓고 / 신작로에는 자동차 바람에 먼지만 나누나’라는 내용으로 노래까지 나돌게 됐다. 이런 ‘시발차’, ‘새나라차’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울산 현대박물관에는 ‘포니’가 국산 최초자동차(1975)라고 전시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즉 미국한인여성회장 최윤희는 삼성교통박물관에 ‘시발택시’가 전시돼 있는데, ‘포니’가 어찌 최초냐고 항의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시발택시’의 시속은 30㎞이고, 그다음 ‘새나라 택시’는 80㎞이다. 당시의 차 이름도 순수 우리말인데 요즘은 어떤가. 베르나, 르노, 그랜저, 소나타, 아반테, 제네시스, 에쿠스 등이다. 또한 외제차 벤츠, 아우디, 도요타, 혼다, 폭스바겐, 그라이슬라 등 차명이 혼돈돼 정신이 빙 돌고 있다. 지난해 외제차 등록이 100만 대를 돌파했다니 그의 부수적인 부품, 수리, 공정 등이 국산의 5-10배나 되니 생각해 볼 일이다. 앞으로 수입차들도 판매 약 3년이 지나면 차 값이 신차에 비해 1/3 이상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환경친화적인 자동차로 전기자동차 및 하이브리드, 연료전지 자동차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 향후 수년 안에 이에 대한 가격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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