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3:54 (목)
황희가 떠오르는 이유는…
황희가 떠오르는 이유는…
  • 박태홍
  • 승인 2015.03.23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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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정부도 청와대도 빈자리가 모두 채워졌다. 행정부처 및 대통령비서실장의 공석이 가져다줄 업무 공백에 따른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켜 그나마 다행이다. 국민들은 안정적 기조의 국정운영을 기대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은 그렇지 못해 국민들은 불안해한다. 공무원 연금개혁을 둘러싼 여ㆍ야의 대립도 그렇고 현 정부의 국정을 야당은 무조건 반대하는 실정이어서 국민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생물이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에 정치도 꿈틀거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꿈틀거림이 여ㆍ야는 물론 국민들 모두가 잘사는 상생을 원하는 것이지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정치가 돼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국민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탱하면서 세상사가 바로 굴러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연유 때문에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입법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차례 회오리가 일은 것 아닌가. 근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나라의 정치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씁쓸하다. 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는 듯 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은 흘러간 과거사에 집착해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옳고 그름을 따지질 않나 국가 정책에 의해 진행되는 행정적 판단에 쐐기를 박고 가처분 신청 등으로 다시 재조정되기를 고집하는 등 여ㆍ야의 극한 대립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야당에서는 이 나라의 정치를 한결같이 불통정치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방송ㆍ신문ㆍSNS 등 각종 매체를 통한 국민들의 알 권리가 충족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소통 아닌가. 다만 정치인들이 내뱉는 소양 없고 여과되지 않은 말들이 국민들을 혼돈 시키고 긴장하게 할 따름이다.

 야당 대표로 당선되고 대권 주자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문재인 대표의 취임 일성이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은 여ㆍ야의 티격태격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야당 대표가 취임 일성을 광범위한 전쟁인 전면전을 선포했으니 야당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가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국무총리로 인준된 이완구 국무총리 역시 며칠 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담화문까지 내보냈다. 이와 때를 같이 한 검찰의 사정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다.

 부패의 고리를 끊고 비리를 척결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들은 왜 지금 이 시점에 사정작업이 진행돼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청와대와 정부 여ㆍ야 모두가 손을 맞춰 선택적 복지ㆍ보편적 복지ㆍ공무원연금개혁ㆍ청년 고용창출ㆍ정치개혁 등 해야 할 일들이 많고도 많은데 왜 사정작업에 얽매이는지 모를 일이다.

 조선조 때 황희(1363~1452)라는 정승이 있었다. 태조ㆍ정종ㆍ태종ㆍ세종 등 4명의 왕을 모신 특별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태조에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시다 90세의 나이로 타계한 황희는 파란만장하면서도 진정한 공직자로서의 삶을 살다 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우왕 2년(1376년) 황희는 음직으로 복안궁 녹사가 됐고 스무 살에 사마시 스물두 살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질 않다가 스물일곱에 또다시 문과에 합격하면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황희가 서른 살이 되던 해 고려가 멸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가 살다가 이성계의 회유와 설득에 의해 나이가 제일 어린 황희만이 조선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그때부터 황희는 60여 년 동안 조선의 주요 관직을 모두 섭렵하면서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고 일컫는 영의정은 지금의 국무총리 격이다.

 황희의 정치적 경륜은 누구도 뒤따를 수 없었다. 성공한 관리로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평가받고 있는 황희는 곧바로 청빈의 대명사였다. 20여 년을 정승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늘 양식이 부족했고 청빈을 넘어 곤궁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화는 사료에 의해 수도 없이 많지만 황희는 녹봉 대부분을 민생구휼을 위해 사용했으며 그들의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개를 키우지 않았다는 일화는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유는 뭘까? 왜 또 지금 이 시기에 조선 시대의 정승 황희의 일화가 떠오르는 이유를 우리 국민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선진 국정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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