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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月館(명월관)
明月館(명월관)
  • 송종복
  • 승인 2015.02.04 2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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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明:명 - 밝다 月:월 - 달 館:관 - 집

 한말 최대 최고의 요리집이며 기생과 무희를 양성ㅎㅐ 전국적으로 출장까지 시키는 서비스업체이다. 이들은 애국심이 함양되어 자신을 초개같이 버리는 정신이 지금에 아쉽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 버리기냐. 너 없는 내 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이 가사는 1940년에 ‘세세년년’이란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다. 예부터 ‘北 평양 南 진주’라는 말이 있듯이 진주 기생은 조선 팔도에서 그 명성이 회자했다. 그 중 산홍(山紅)은 왜정시절 ‘프러포즈’하는 매국노 이지용의 죄를 나무라며 동침을 거절하고 자결한 여장부로 이 명월관의 출신이다.

 ‘명월관(明月館)’은 한말 요릿집의 비조(鼻祖)이며, 최대의 ‘휴게실(요정)’이다. 3ㆍ1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도 이곳으로 태화관(중국식당)이라고도 불렸다. 더구나 이 휴게실에 속해있는 진주기생 산홍은 이곳에서 명성을 날렸기에 지금도 기생하면 진주를 떠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기생으로 부르는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전북 장수 사람으로 진주에 온 의젓한 가정도우미다. 임진왜란 때 왜인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전승연회를 연다는 소식에 그는 기생으로 가장해 잠입하고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해 수장시킨 순국열녀이다.

 1896년 독립문을 세울 때 철근을 사용한 근거는 있으나, 재료가 변변치 못해 고층건물은 지을 수 없었고, 겨우 석조로 몇 층 정도 올렸다. 이 명월관은 ‘요릿집’으로 1912년에 3층으로 연건평 300평 객실은 20개이다. 당시 조선의 ‘요릿집’하면 ‘명월관’으로 명성이 높았고, 가격이 비싸 웬만한 돈으로는 감히 드나들 수 없었다. 이 연회석 때는 의례히 기생들을 동석시키는데 이들은 수용하기 위해 ‘집고각(集古閣)’이라는 별관까지 뒀고 때로는 지방까지 출장했다. 또한 서민들은 이름도 모르는 술 종류와 신식요리인 전골집, 냉면집, 장국밥집, 설렁탕집, 비빔밥집, 강정집, 숙수집 종류 등이 있었다.

 이같이 조선에 큰 요리점이 있다함은 자랑할 만했다. 아울러 조선에 온 외국인이 이 ‘명월관’에 가보지 못한 이는 조선을 봤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은 명창과 무희들이 귀빈들의 심신을 풀어주며, 흥을 북돋아 주어 인기가 대단했다. 이 사업이 번창해 전국에 지점을 두어 출장까지 시켰다. 그 중 대표적인 명기가 바로 산홍이다. 요즘은 날만 새면 ‘성 추문’이 뉴스를 칠갑하고 있는데 신성한 ‘산홍’이나 ‘논개’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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