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 함축적 의미
토사구팽 함축적 의미
  • 정창훈
  • 승인 2015.02.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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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김해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원문은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이다. ‘사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토사구팽이란 한자숙어는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이 그 주인공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졸병이었으나 유방의 눈에 띄어 실력을 인정받았고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무예실력도 뛰어났지만 동시에 참을성도 대단했다. 시장통에서 싸움을 피하고자 실력을 숨기고 건달패의 다리 사이로 기어간 일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너무 참을성이 강한 나머지 우유부단한 것이 흠이었다.

 후에 한나라 초대황제인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초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군사력은 없고 명분만 있는 유명무실한 왕이었다. 한제국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방과 참모들은 이제 쓸모가 없어진 한신을 모반죄로 체포해 장안으로 압송하면서 그의 신분은 회음후로 격하된다. 이때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며 그 유명한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항우를 쳐부수고 쓸모가 없어졌으니 앞세웠던 사냥개를 팽(烹)했다는 것이다.

 토사구팽이란 고사성어의 유래는 교활한 토끼가 죽게 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진다는 말로 사냥개의 목적은 토끼사냥이고,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사냥개는 죽여 버린다는 뜻이다. 이용가치의 상실로 버려지는 게 비정함을 표현한 말이다. 이후 토사구팽은 필요할 때는 요긴하게 쓰다가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빗대어 쓰이는 유명한 문자가 됐다.

 정작 문자의 원뜻에 충실한 토사구팽은 최근 캐나다에서 일어났다. 카누에 몇 달치 식량을 싣고 독일산 셰퍼드와 함께 온토리올에서 804㎞ 떨어진 해안지대로 오지 여행에 나선 40대 남자와 애견이 화제의 주인공이다.

 여행 중 남자가 야생 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개가 달려들어 주인의 목숨을 구했는데, 조난을 당해 굶주리던 주인이 사흘 만에 충견을 잡아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후 3개월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구조된 이 남자를 두고 생존전문가와 동물애호가 사이에 평가가 엇갈렸다고 한다.

 영화 ‘묵공’에서 처음 양성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던 혁리는 뛰어난 지략으로 기적처럼 강력한 조나라 군대의 공격을 막아낸다. 혁리는 신분보다는 능력위주로 인재를 발탁하고,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서며, 검소한 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격려한다. 누가봐도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이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소학에 이르길, “사람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고, 나에게 아첨하는 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권력이 있는 자일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하다. 성 사람의 신망을 한몸에 받는 혁리를 양성의 왕이 좋아할 리 없다.

 혁리가 성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수록, 왕의 혁리에 대한 의심은 커져 갔다. 마침 조나라 장군이 군대를 물리는 척하는 계책을 쓰자, 침략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한 왕은 역모의 혐의를 씌워 혁리를 죽이려 한다. ‘토사구팽’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혁리를 따르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인다.

 “윗사람보다 더 인정받으려 해선 안 된다. 더 인정받는 것은 겉으로는 승리인 것처럼 보이나 결국 파멸의 끝을 보게 된다. 태양의 빛을 능가하지 않으면서도 늘 빛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지혜를 배워라.”

 철학자 그라시안이 남긴 교훈이다. 정말 현실적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리더는 철학과 이상이 있어야 하나, 성인군자여선 안 된다. 그 높은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여우같은 현실론자가 돼야 한다. 고매한 공자이기보다는 현실적인 마키아벨리가 돼야 한다. 정말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올 때, 머물 때, 떠날 때의 모습이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존경까지 받을 수 있다. 나의 의지로 머물고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다수의 나약한 모습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물러날 때를 제대로 알아 실천에 옮긴 인물의 표본인 범려가 있다. 사람들은 범려처럼 물러날 줄 모르고 또 물러나려 하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라는 글귀를 종종 본적이 있다. 육신의 발자취는 땅에 남기고, 마음에 품은 자취는 허공에 맴돌게 하면서 나의 모습을 지켜달라고 하고 싶다. 토사구팽 당하지 않고 내 지나온 발자취가 아름답고 나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도록 뒷모습이 아름답고, 앞모습이 희망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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