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안고 선 고택ㆍ서원 600년 한 뿌리 대변
세월 안고 선 고택ㆍ서원 600년 한 뿌리 대변
  • 음옥배 기자
  • 승인 2015.01.01 2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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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군북면 원북마을 함안조씨
▲ 중시조인 조려의 고택 등 많은 유적이 남아 맥을 이어오고 있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마을 함안조씨 집성촌이 600년의 역사를 품고 자리하고 있다.
본동ㆍ태실ㆍ새절골 3개 부락 81세대 중 29세대 33명 거주
고려 말 공조전서 조열 첫 정착 어계고택 道 유형문화재 지정
백이숙제 연관 지명ㆍ유적 많아 채미정 고사리 캐 먹는 집 뜻
단종에 대한 절의 곳곳 배어

 함안군 군북면 원북마을은 함안조씨 집성촌이다. 군북면사무소가 있는 시가지에서 지방도 1004호선을 따라 진주방면으로 4㎞정도 가면 괘방산의 동남쪽 발치에 형성된 마을이다.

 본동과 태실, 새절골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돼 있으며 옛날에는 기차역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살았으나 점차 인구가 줄어 현재는 81세대 133명이 살고 있다. 이에 따라 역도 간이역으로 바뀌었다가 경전선 복선화사업 이후 폐쇄됐다.

 1587년 편찬된 함주지에 의하면 원북마을에 작원(鵲院, 까치원)이라고도 부르는 어속원(원은 공적인 임무를 띤 사람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말함)이 있었는데 원의 북쪽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원북(院北)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함안의 지명유래에 나와 있다.

▲ 조정에서 1713년 조려 등 생육신을 모신 서원의 이름을 ‘서산’으로 사액을 내려 서산서원에는 ‘서산서당’ 현판이 걸려있다.
 한편, 어속(於束)이란 명칭도 예부터 골이 깊고 외진 곳이어서 혼자서 고개를 넘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쉬우므로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닌 데서 유래됐다고 하며 함주지에도 어속고개가 있어 진주 반성현으로 큰 길이 나 있다고 돼 있다.

 마을에서 함안조씨는 29세대 33명으로 25%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율은 낮아도 종가를 중심으로 600년이 넘는 세월을 집성촌을 형성해 왔으며 특히 중시조인 조려의 고택과 서산서원, 채미정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기에 함안조씨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함안조씨의 시조는 조정으로 당나라의 절강사람인데 동생, 조부, 조당과 함께 귀화해 고려가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벽상일등공신에 녹훈되고 대장군 원윤을 지냈다. 그 아들 조간은 중랑장, 증손 조시우, 조영준은 각각 오위도영장과 형부상서, 9세손 조천계는 판도판서를 지내는 등 후손들이 고려왕조에서 대대로 현달했다.

 이런 영향은 원북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열에게로 이어진다.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지낸 조열은 거문고와 그림, 시에 능했는데 달밤에 거문고를 타면 그 소리가 몇 리 밖까지 들렸고 그림도 후세에 전한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조순 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공양왕에게 이성계 부자의 병권을 거둬 사직을 보존할 것을 삼일에 걸쳐 상소했으며 열 차례나 얼굴을 대하고 간언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차마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축출하니 함안으로 돌아와 군북면 명관리에서 지내다가 원북마을로 옮겨 살았다.

 전서 벼슬에 있을 때 변빈의 집에서 성만용, 정몽주, 김성목, 이색, 홍재와 함께 술잔을 들고 회포를 논하다가 이색이 “비간은 죽었고 미자는 떠났으며 기자는 종이 됐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결의한 바 있다.

 1394년 건립을 시작한 경복궁이 1395년 완성되자 태조는 낙성연을 여는데 거문고를 탈 사람으로 조열을 정하고 친서와 가마를 보내 초청했다. 태조가 친구를 위해 거문고를 타 달라고 하자 공민왕의 경연에도 여러 번 사양했는데 여기서 왕의 청을 듣는다면 후일 지하에서 공민왕을 뵐 면목이 없다며 거절했다. 황희와 권근이 돌려보내라고 간언해 돌아왔다.

▲ 원북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어계고택 전경.
 1399년에는 정종이 명을 내려 태조의 어진(御眞)을 그리라고 했는데 공민왕의 어진 요청에도 불응했다며 역시 불응하니 정종이 노하여 투옥시키자 태조가 이 사실을 듣고 석방하게 하는 등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가 말년을 보낸 원북재에 금은유풍(琴隱遺風)이란 현판이 있으니 그 충절을 잇겠다는 의미다.

 어계 조려는 조열의 손자로 1420년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났으며 1453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455년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이듬해 4월에 공부를 접고 돌아와 원북마을에 은거했다.

 ‘영월읍지’에는 청령포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조려는 한 달에 세 번씩 찾아와 원호의 집에 묵고는 단종께 문안을 드렸고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돌아가자 청령포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어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건네줬기에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왔다는 호배도강전설이 기록돼 있다.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어계비원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정절공어계조려선생사적비는 호랑이 등위에 비가 세워져 있는 독특한 형태로 조려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원북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어계고택은 몇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은행나무 아래 고색창연하게 서 있으며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돼 있다.

 대문채와 원북재, 향례를 올리는 조묘로 구성돼 있는데 대문채에는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정절의 시호를 내린 정려문이 걸려있다. 원북재는 한가운데 원북재 현판이 있고 오른쪽에는 금은유풍, 왼쪽에는 어계고택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묘는 어계집 책판과 함께 하사품인 동으로 만든 향로와 선생이 썼던 죽장을 보관했으나 분실 우려로 지금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원북마을을 중심으로 조려의 행적이 있는 곳에는 백이숙제와 연관된 지명이나 유적이 많은데 이는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에 절의를 지킨 것처럼 조려도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기 때문이다.

 군북면 사촌리, 동촌리, 명관리 일원에 걸쳐 있는 산이 있는데 ‘함주지’에는 두 봉우리가 대치하므로 쌍안산(雙岸山)으로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원북재에서도 잘 보이는 이 산은 지금 백이산으로 바뀌었다.

 산기슭에 조려가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서산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1713년 조려를 비롯한 생육신을 모신 서원의 이름을 서산(西山)으로 사액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육신의 충절이 백이의 절개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쌍안산이 백이산으로 불려졌고 또 두 봉우리 중 높은 봉우리를 백이봉이라 하고 작은 봉우리를 숙제봉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마을 입구에 있는 채미정(菜薇亭)도 마찬가지다. 고사리를 캐 먹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는 곧 조려가 백이숙제처럼 충절을 지키다 죽었음을 표현한 것인데 실제 조려는 그 뒤 낚시와 학문으로 소일하며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채미정 앞에는 마을에서 흘러온 물길이 돌아나가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조대(釣臺)로 부른다. 조려가 낚시를 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 바위 위에는 후대에 세운 청풍대가 있는데 채미정의 좌우에 걸린 백세청풍의 맑은 기상을 바람과 더불어 말하고 있다.

 또 물길을 따라 2㎞ 정도 내려가면 하림마을에 고마암이라는 경치 좋은 절벽이 있는데 그 아래 바위를 어조대라고 한다. 역시 조려가 낚시를 하던 곳이고 그 위의 절벽에도 백세청풍이 새겨져 있다.

 한편, 청풍대가 있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도로 건너편에 지난 11월 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서산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생육신인 조려, 이맹전, 원호,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 등의 제향을 위해 창립한 서원으로 1706년 처음 세워졌으며 1713년 사액서원이 됐지만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1981년 복원에 착수해 1984년 완공됐다.

 강학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인 숭의당과 동재, 서재,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등으로 구성돼 있는 대규모 서원으로 음력 9월 9일 생육신의 후예들이 모여 국천제를 올리고 있다.

 원북마을에 거주하는 조용훈(75) 씨는 “원북마을 안쪽의 괘방산 자락에는 입향조이신 조열 할아버지와 그 증손자이신 조금호, 고손자이신 조수천, 조적 할아버지가 안장돼 있는 묘역이 잘 정리돼 있다”며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객지로 떠난 분이 많아 아쉽지만 그래도 함안조씨의 전통이 살아있는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후손에게도 충절의 정신이 잘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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