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9:40 (수)
지식은 칼과 같은 것이다
지식은 칼과 같은 것이다
  • 권우상
  • 승인 2014.12.18 2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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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상 명리학자ㆍ역사소설가
 필자는 1960년에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주간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대학에 다니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그때 처음으로 ‘정치학 개론’을 강의하는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식은 칼과 같아서 잘 사용하면 유익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흉기가 된다. 지금까지 배운 지식, 그리고 앞으로 배울 지식을 사회에 나가서 절대로 흉기로 사용하지 않길 바란다.”

 필자는 이 말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잊어본 적이 없다.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칭 명문대학을 나와서 정부기관 등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정직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을까? 물론 정직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탐욕은 그 처음이 어디인지 모르며 그 끝도 아득하다. 인간은 탐욕의 그물에 매달려 살면서 그것이 탐욕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탐욕의 그물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물을 더 탄탄하게 동여매고자 온갖 지식을 다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탐욕과 부정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못하게 배척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런데도 지식을 오히려 탐욕과 부정의 편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지식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마음속 탐욕은 하나의 소유물로 화현돼 자기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는 모든 존재가 자기 내재율 속에 존재하고 소유물이 되기를 원하고 있고 그 원한 바를 실천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갈등의 능선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형국이다. 부(富)와 빈(貧)의 갈등을 비롯해 이념적 갈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하나로 통합된 애국심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화합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불경에 ‘화합이란 물에 기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물에 우유를 섞는 것이다’라고 했다. 분열의식, 대립의식이 야기되는 것을 자기의식이라고 뽐내고 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겨자씨앗보다 더 작은 지식이 아닐까 싶다. 지혜의 문전에 들어가면 지식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식은 지혜의 아들이다. 지식인 아들이 지혜의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것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서 나무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불경에서 말한다.

 발전한 물질문명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물질에 대해 주인이 되지 않을 때 노예가 되는 것이다. 물질에 유혹된 의식은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탐욕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아버린 사람이라야 자비를 구현할 수 있다. 탐욕은 가지려는 사람의 몸부림이요, 자비는 주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부림이다. 가지고자 하는 욕망의 불을 끄면 주고자 하는 침묵의 삼매를 누린다. 자비와 구원이 내속에 샘솟아 오르는 소리의 합창이 지구 저쪽 이쪽에서 메아리칠 때 세상은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배우지 못해 지식이 없는 사람이야 그렇다해도 고등교육을 받고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입법, 사법, 행정 등 높은 직위에 있는 지식인이 비리나 언행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일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전직 국회의장이 골프장에서 여성 캐디를 성추행했다 해 물의를 일으킨 일이나, 한 대학 교수가 여학생을 성추행해 고소당한 일이나, 항공사 부사장의 땅콩 파문 등 일련의 사건을 보면 이들은 지식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항공사 부사장 땅콩 파문의 경우 “접시에 조금만 담아 줘”하며 웃는 낯으로 대했다면 지식의 미(美)가 묻어나 파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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