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05 (금)
렛츠 탱고- 끝
렛츠 탱고- 끝
  • 이주혜
  • 승인 2014.12.09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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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에따의 허리를 깊숙이 끌어안고 그녀의 몸을 뒤로 확 젖혔다. 마리에따가 다리를 높이 치켜들며 화답했다. 마리에따가 검은 머리를 출렁이며 다시 고개를 들고 치켜든 다리로 곽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 바람에 머리에 꽂아둔 붉은 꽃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충격에 꽃잎 하나가 찢어지며 튀어 올랐다. 꽃을 주워야 하나, 주춤거리는 곽의 귀에 마리에따의 뜨거운 입김이 쏟아졌다.

 쉿, 렛츠 탱고. <끝>

▲ 이주혜
연재를 마치고…

이주혜
1971년 전주 출생.
서울 거주, 4인 가족의 주부이자 번역자로 바쁘게 사는 와중에 감히 소설가 자리를 넘보고 있음.

 언젠가 벗이 속삭인 적이 있다. 우리 늙고 늙어서 홀가분해지면 함께 아르헨티나로 가자. 그곳에는 탱고를 가르쳐주는 하숙집이 있대. 거기서 먹고 자고 하루 종일 춤을 추자. 10년도 더 된 이야기니, 친구나 나나 한창 뭔가에 단단히 붙들려 있을 때였다. 혼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어린 생명을 책임지고 있었고 밥벌이의 고단함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절로 주워 삼킬 때였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과목이 있다면 나보다 한참 선배일 분들이 있다. 시댁과 친정의 부모님 네 분. 아르헨티나의 탱고 하숙집이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에 미늘 같은 닻을 내린 지 10년간의 행적을 보면, 나보다 그분들의 삶이 훨씬 더 극적으로 바뀌어 있다. 나야 기어다니던 아이들이 걷고 뛰고 학교에 들어가고 어느새 코 밑이 가무잡잡해지는 과정을 한 자리에서 지켜보며 기저귀 갈던 일이 고작 소풍 도시락 싸주는 일 정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네 분 중 한 분은 암 진단을 받으셨고, 한 분은 심장 문제로 해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게 되었으며, 한 분은 일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아직 육아와 살림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허리만 굽어 가고 있고 또 한 분은 어떠한 사전 징후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러니 내게 있어 그 10년은 육아와 살림과 밥벌이에서 점점 홀가분해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내게 목숨을 붙여주고 그 목숨을 키워주셨던 분들의 목숨이 시나브로 잦아드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생에는 결코 홀가분한 시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내게는 아르헨티나의 탱고 하숙집 같은 신기루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에미야. 도통 잠이 오지 않는구나. 의사 말이 우울증이 심각하다는데, 상처한 지 벌써 4년인데, 이놈의 우울증이 왜 지금 승하는 게냐? 수면제가 없이는 한숨도 이룰 수가 없구나. 수화기 너머 시아버지의 목소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보다도 더 깔깔하다. 에미냐? 무김치 좀 담가 보냈다. 지난번에 보니까 이 서방 젓가락이 자꾸만 무김치 쪽으로 가더만은. 푹 익혀서 내라. 아버지는 괜찮아. 심장이야 한 번 나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니 조심조심 사는 수밖에 더 있겠냐? 그래도 어린 아기들이 옆에서 고물거리니 네 아버지가 웃는다. 나야 괜찮지. 너희도 키웠는데, 겨우 어린 애 둘이면, 날아다니지. 걱정 마라. 걱정 말래두. 친정어머니와의 통화는 늘 조카들의 울음소리로 끝이 난다.

 에미 너도 늙냐? 흰머리가 자꾸 늘어가는 걸 보고 시아버지가 끌탕을 한다. 부모 앞에서 늙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불효가 아닐까. 불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나보다 먼저 그분들을 아르헨티나로 보내드렸다. 활자 사이에서 그분들의 은발을 멋지게 뒤로 넘겨 드리고 버건디의 화려한 셔츠를 입혀 드리고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장인의 고급 탱고슈즈를 신겨 드린다. 그분들은 날렵하게 무대를 누비며 누구보다 아름다운 땅게로나 땅게라가 된다. 행간의 그분들은 행복하다. 삶을 옥죄는 멍에도 치욕도 통증도 없다. 오직 내 맘대로 주도하는 춤사위가 있을 뿐이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와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그분들은 지금을 살아간다. 묵묵하게. 때론 담대하게. 그래서 불효할 수밖에 없는 나는 감히 그분들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다. ‘쉿, 렛츠탱고’라고.

렛츠 탱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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