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츠 탱고- 6
렛츠 탱고- 6
  • 이주혜
  • 승인 2014.12.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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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 땅게로 크로스의 탱고슈즈가 날렵하게 무대 위를 누볐다. 둘의 활약을 보며 곽은 내심 오늘의 출정이 수포로 돌아가겠다고 체념했다.

 비슷한 처지의 뒷방 늙은이를 찾아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곽의 몸이 흠칫 굳었다. 입구 옆 구석자리에 혼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양인. 복장만 보면 관광객도 땅게로도 아니었다. 와인잔을 든 손에 힘이 쑥 빠졌다.

 렛츠 탱고?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에따가 서 있었다. 곽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구석자리에 앉아 이쪽을 보는 동양남자 때문인지 춤을 청하는 마리에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리에따가 손을 내밀었다.

 렛츠 탱고?

 마리에따는 귀밑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을 꽂고 있었다. 활짝 벌어진 꽃잎이 곽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곽은 반사적으로 구석자리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곽은 손을 내밀어 마리에따의 손을 잡았다.

 렛츠 탱고.

 무대 한가운데 마리에따와 마주 섰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가벼운 홀딩 자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탱고처럼 맘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유메이는 지나치게 가까웠고 아내와는 너무 멀었다. 반주단이 저마다 악기를 매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도네온과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제각각 다른 음을 냈다.

 아내는 이제는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는 유메이를 입에 올리며 곽의 목을 졸랐다. 가래 같은 욕을 뱉어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아내는 거칠고 추한 노파가 되어버렸다. 과도를 들고 곽의 목을 노린 날은 아내를 말리다가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 쥐어야 했다.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아내가 허겁지겁 찍어 먹었다. 곽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피와 침으로 범벅이 된 아내의 손을 그러잡고 울었다.

 너도 가고 나도 가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내를 붙들고 곽은 오랜만에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내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쌔근쌔근 아기의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마귀 들린 아내가 잠시 천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엾은 아내를 다시 마귀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다. 곽은 생애 처음으로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그것이 비록 나락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일지라도. 아내는 잠깐 겁에 질린 눈을 부릅떴을 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지금쯤 고향집에는 모란이 피었을까? 아내의 육신을 거름 삼아 그 어느 해보다 탐스럽게 피어올라 집안 가득 향기를 흩뿌리고 있을까? 모란에 향이 없다는 옛말은 거짓이다. 곽은 수십 년간 모란 향기에 취해 봤다. 유난히 질긴 올해의 향기는 바다를 건너 고향집의 대척점인 이곳까지 곽을 찾아왔다. 곽의 탱고 사위는 모란 향기를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몰랐다.

 아들놈이 마지막 탐욕을 부려 빈 껍데기만 남은 고향집마저 팔아치우자고 덤빈다면, 딸년이 쥐 똥 만한 효심을 되찾아 제 어미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다면, 집안을 샅샅이 뒤져 아내와 곽을 찾으려 든다면, 기어이 굴삭기 시퍼런 이빨이 모란밭에 꽂힌다면, 곽의 마지막 선택은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 달 넘게 지루한 추락을 거듭 중인 곽의 머리통은 드디어 단단한 바닥을 만나 통쾌하게 부서질 것이다. 간질거리는 상처를 끝까지 헤집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곽은 여기까지 왔다.

 반도네온을 선두로 반주가 시작되었다. 악기가 일제히 하나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다. 곽은 마리에따의 몸을 살짝 잡아당기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마리에따의 검은 머리가 물결 치며 따라왔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죠.

 하숙집을 찾은 첫날, 마리에따는 먼 이국에서 온 늙은 손님의 수줍음 앞에 영화 속 대사를 들려주었다.

 인생도 그렇소?

 곽의 물음에 마리에따는 대답없이 곽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밀롱가의 첫 탱고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마리에따의 어깨너머로 동양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무대 위를 향해 있었다. 아니, 아니. 스텝에 집중하자. 하나 둘 셋 8자! 하나 둘 셋 8자! 곽은 지금을 붙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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