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4:15 (금)
렛츠 탱고- 5
렛츠 탱고- 5
  • 이주혜
  • 승인 2014.12.07 2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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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망측한 소리냐며 곽의 등을 찰싹 때리는 안 하던 짓까지 했다. 안 하던 짓은 계속 이어졌다. 밥을 퍼넣다 곽의 뺨을 후려친 적도 있었다. 맛있는 조기에 젓가락을 꽂았다는 게 이유였다. 아내는 점점 탐욕을 부렸고 시샘을 했으며 솔직해졌다. 아무 때나 먹고 아무 때나 벗었다. 그리고 평생 눌러왔던 원망을 한꺼번에 끌어모아 곽을 괴롭혔다. 순하던 아내 입에서 낭자한 욕이 저잣거리 수챗물처럼 쏟아졌다.

 곽은 아내가 실성한 것이라 믿고 정신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아내는 곽의 인생에 찾아온 마지막 족쇄였다. 아들도 딸도 곽의 연락을 받고 제 어미를 보러 왔지만, 어미 손을 잡고 한바탕 울음을 쏟아냈을 뿐 누구 하나 선뜻 맡겠다고 나서는 것이 없었다. 아들은 제 몸 하나 돌보기도 힘들어 보였고 딸은 제 몸 하나를 움직여 건사할 몸이 이미 여럿 딸려 있었다. 각자 염치없는 표정을 입고 봉투 하나씩을 내밀더니 붙잡을세라 서둘러 제 갈 길을 떠났다. 아내가 잠깐 돌아온 정신을 그러쥐고 아들딸을 부르며 울었다.

 에라, 이 불쌍한 여자야.

 곽도 잠깐 울었다. 아내가 가엾었지만 자기 신세가 더 불쌍해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앞으로 몇 년을 어떻게 더 시달리다 죽게 될까. 그 길이 아득해 감히 발걸음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밀롱가 출정을 결심한 날 곽은 여느 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아직 밤기운을 떨쳐내지 못해 어슴푸레했고 그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망고나무 홀로 고고했다. 크로스는 남산 만한 배를 들썩이며 코를 골았고 베르베르는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연방 사타구니를 긁어댔다. 이 낯선 일상을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자신이 없었다.

 마리에따의 방도 안느의 부엌도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문 밖은 고양이 한 마리도 얼씬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도 찾아오지 않았다. 곽은 밤새 짓무른 눈을 질끈 감아 그림자의 잔영을 떨쳐냈다. 망막 건너편에서 고향집에 두고 온 붉은 모란밭이 출렁였다. 모란은 무사한가.

 빛이 반구를 그리며 하루치를 지나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거리 곳곳에 기묘한 활기가 들어찼다. 곽은 아껴두었던 탱고슈즈를 골라 들었다. 칠흑같이 검은 가죽 위에 모조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나란히 박힌 특별한 구두였다. 포마드를 발라 은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다려놓은 바지를 꺼내입고 마지막으로 모란빛깔 셔츠를 입었다. 밀롱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한쪽 어깨가 기우뚱한 은발의 노인이 곽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봐, 노여움을 풀어. 벽돌탑을 허물어버리고 여기까지 왔잖나.

 인생이 벼랑 끝까지 자신을 내몰았다고 느낀 순간 곽은 스스로 몸을 날리는 쪽을 선택했다. 나락 끝에 단단한 바위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스스로 선택한 끝을 보리라 오기를 부렸다. 팔십을 코앞에 둔 곽이 처음으로 직접 골라든 자기 패였다. 죽을 자리로 가는 패일지라도 제 손으로 뽑아들었다는 데 곽은 희열을 느꼈다.

 오, 실버, 오늘 의상 좋은데?

 흰색 셔츠를 입은 베르베르가 곽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간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깜둥이 새끼. 크로스는 툭 튀어나온 배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프릴장식 셔츠를 골랐다. 배지느러미를 파닥이는 커다란 복어 같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마리에따의 하숙생들이 떼를 지어 탱고 카페로 몰려갔다. 한 줌의 흥분과 기대감, 또 한 줌의 불안감이 매끄러운 구두 코 위로 자꾸만 미끄러졌다. 카페 안은 벌써 도시 곳곳에서 몰려온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간혹 몸가짐과 걸음걸이부터 다른 전문 댄서들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곽처럼 탱고를 배우러 온 초보와 관광객이었다.

 베르베르가 가장 먼저 파트너를 잡아 춤을 추었다. 풍짝거리는 반도네온과 바이올린의 흥겨운 연주에 어울리는 다소 경박한 춤이었다고 곽은 생각했다. 크로스와 안느가 뒤를 이었다. 안느가 크로스를 선택하자 곽은 불안해졌다. 늙은이 동양 남자, 그것도 초보를 선택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은근히 안느를 무시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안느는 크로스의 리드를 따르는 척하며 노련하게 모든 것을 리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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