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9:48 (금)
렛츠 탱고- 4
렛츠 탱고- 4
  • 이주혜
  • 승인 2014.12.04 2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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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고 추는 남자 땅게로의 역할은 분명했다. 마치 한집안의 가장처럼 모든 것을 책임지고 전체적인 리드를 해야 했다. 어떤 음악이 들려오든지 나름대로 해석을 통해 스텝을 결정하고 동시에 상대방 땅게라를 이끌어야 했다. 탱고를 출 때만큼은 오로지 완벽한 가장, 완벽한 아버지, 완벽한 땅게로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초보자 곽이 욕심내는 땅게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곳에 있었다. 노구에 연습 진도도 더뎠다. 탱고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대신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춤이었다. 그게 바로 곽이 탱고를 선택한 이유였다. 곽의 인생은 무한한 책임만 벽돌처럼 높이 쌓여 있어서 자유를 찾으러 조금만 꿈틀거려도 밑돌부터 흔들렸다.

 ‘나이롱’이나마 종손 노릇을 작파하지 않고 납작 엎드려 고향을 지키던 곽에게 인생은 계속해서 어퍼컷을 먹였다. 아들 딸을 모두 서울로 올려 보내 마을에서는 성공한 집안이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빛 좋은 개살구답게 아들놈이 집안의 전답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대학까지 나왔으니 작아도 어디 견실한 기업에 들어가 착실하게 월급을 모아가며 소박하게 살아주기를 기대했으나 아들은 헛바람이 잔뜩 들어 한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고깃집에 오락실, 노래방까지 손대지 않은 사업이 없었고 주식과 경매까지 기웃거렸다. 전답은 일찌감치 결딴이 났고 선산까지 팔아치운 다음에는 친척들 볼 낯이 없어졌다. 어서 빨리 종손 자리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게 소원이었던 곽은 아들의 파행으로 깊은 내상을 입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주먹질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부모 얼굴에 똥칠하더니 시내에 큼직한 주점을 열고 여자장사를 해 부모 용돈을 댄다는 이웃의 아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아들놈이 제 목숨을 운운하며 아비에게 협박 같은 애원을 해왔을 때 곽은 쇠락해가는 고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마지막이라고 오금 박으며 부쳐주었다. 곽 자신의 마음에도 정말 마지막이라고 단단히 다짐을 두었다. 그날 딸년이 전화를 걸어 볼멘소리를 했다. 저는 당장 전셋값 오른 걸 메우지 못해 반지하로 나앉을 판인데 허랑방탕한 오라비에게 꼬라박을 눈먼 돈이 있으면 딸자식한테도 좀 나눠줘 보라며 제 설움에 겨워 악을 썼다. 딸년 사정 모르는 바 아니고 그 심사 헤아려지기도 했으면서 곽은 기어이 모진 말로 벌집 쑤시듯 딸을 헤집어놓았다. 아내를 쏙 빼닮은 딸에게 처음부터 잔정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딸은 꺼이꺼이 울면서 이럴 거면 연을 끊자, 악다구니를 써댔고 그 후 정말로 고향에 발길을 끊었다. 제 어미하고는 전화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눈치였지만 곽은 외손자 안부가 궁금하기는 하였어도 계집들끼리의 일은 계집끼리 알아서 하라며 애써 관심을 두지 않는 척했다.

 늘그막의 곽은 고독했다. 아들딸 일로 서운함이 잔뜩 낀 아내는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정을 깡그리 긁어모아 거두어버렸고 아들놈은 제 부모 죽기 전에는 더는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명절 때도 갖은 핑계를 대며 고향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건넨 돈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어디 가서 노숙자나 되지는 않았는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딸은 곽에게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납작 엎드린 날들이 계속되었다. 몇 푼 안 되는 연금을 받아 이자를 갚고 집 밖의 텃밭에서 일군 푸성귀로 연명하는 나날이었다. 제사도 오대봉사에서 삼대봉사로 줄였다. 눈치 볼 어른들도 저승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곽은 자신의 인생이 벽돌탑에 눌려 완전히 찌그러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팔자도둑은 몬하는갑다.

 어머니의 한탄이 어제 본 듯 떠올랐다. 몸에 한기가 들었는지 자꾸만 추웠다. 욕심을 줄이고 줄여 콩알만큼 줄였을 때는 이대로 숨만 쉬다가 아프지 않고 죽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인생은 곽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퍼컷 연타에 정신을 못 차리는 곽을 기어이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아내의 이상을 처음 눈치 챈 것은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어느 봄밤이었다. 어김없이 모란밭 머리를 서성이는 곽의 앞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내였다. 늙은 아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허물어진 허릿살과 뱃살에 달빛이 쏟아졌다. 더욱 기함할 노릇은 다음날 곽의 추궁에 아내가 전날 밤의 일을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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