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1:24 (토)
렛츠 탱고- 3
렛츠 탱고- 3
  • 이주혜
  • 승인 2014.12.03 2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곽은 백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였지만 백부의 집은 종가인 만큼 곽이 나고 자란 집보다 살림살이가 단단하고 규모가 있었다. 함께 코를 달고 뛰어다니던 형들은 그런 곽을 시샘해 어쩌다 만나면 어른들 몰래 다리를 걸었다. 백모가 알뜰히 챙겨준 옷들은 걸핏하면 무릎에 구멍이 뚫렸다. 서러워도 안겨 울 품이 없었다. 백부의 집도 친부의 집도 어느 한 군데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곳이 없었다. 곽의 삶은 열 살 전후로 확연히 달라졌다.

 하나 둘 셋 8자! 하나 둘 셋 8자!

 오쵸가 제법 봐줄 만해졌다. 이마 골을 타고 땀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망고나무가 바람결에 몸을 뒤챘다.

 실버, 같이 해?

 부엌 앞에 앉은뱅이 의자를 내놓고 감자 껍질을 까던 안느가 행주치마에 손을 쓱쓱 비벼 닦으며 물었다. 실버는 마리에따의 탱고하숙집에서 통하는 곽의 별칭이었다. 백금처럼 화사한 은발은 늙은 곽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마리에따는 없어.

 살짝 주위를 둘러보는 곽의 시선을 눈치 채고 안느가 잘라 말했다. 우라질. 간밤의 꿈은 길몽이 아니었나?

 렛츠 탱고?

 늙은 안느가 주름이 늘어진 눈으로 알듯 말듯 윙크를 보냈다. 세계 각국에서 탱고를 배우러 찾아오는 마리에따의 작은 하숙집은 국적불명의 영어가 통용되는 기묘한 소우주였다. 체념이 빠른 곽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렛츠 탱고!

 안느의 등 뒤로 오른손을 경계가 허물어져 버린 허리에 왼손을 올렸다. 늙은 여자의 비대한 가슴과 배가 한꺼번에 물컹하고 닿아왔다. 인디오의 혈통을 물려받은 안느는 쌍꺼풀이 진한 눈을 빼고는 이목구비나 체구가 한국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감자껍질 색깔 피부에 잔주름이 골골 패어 있는 모양새가 어머니가 알뜰살뜰 돌보던 고향집 푸성귀 밭을 닮은 것도 같았다.

 완 뚜 쓰리 에잇! 완 뚜 쓰리 에잇!

 안느의 리드를 따라 다리를 사선 방향으로 뻗으며 8자를 그렸다. 안느는 거울처럼 곽의 걸음을 미리 보여주었다. 방향을 보면 곽이 끌고 가는 것 같지만, 실제 리드는 안느의 예측이 맡고 있었다. 안느는 역시 노련한 선생이었다. 안느가 절굿공이 같은 다리로 곽의 엉덩이를 휘어 감으며 윗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곽이 안느의 허리를 받치며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안느가 불쑥 몸을 일으키며 곽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자 두 사람의 샅이 가까이 닿았다. 기습공격 같은 장난질에 곽의 아랫도리가 찌르르 울었다. 안느가 고개를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곽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느의 리드를 따라가 보지만 이내 스텝이 엉키고 말았다. 까르르. 까르르. 안느는 곽을 조롱하는 얼굴을 굳이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탱고도 멈추지 않았다. 곽 혼자 스텝을 신경 쓰랴 아랫도리를 신경 쓰랴 허청거렸다. 늙고 뚱뚱한 부엌데기 주제에 감히 나를, 싶은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꿈속처럼 안느를 매정하게 밀어내지는 못했다. 빵 속 같던 유메이도 지금은 감자껍질처럼 쪼그라들었을까.

 안느가 유려하게 8자를 그리며 휙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스텝이 엉키지 않고 곽도 회전에 성공했다. 안느의 어깨너머로 올리브색 대문이 보였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곽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살쾡이처럼 잽싸게 스쳐간 그것은 사람이었다. 동양인 남자였다고 곽은 확신했다. 지독한 노안에 순발력도 바닥인 곽이 찰나에 스쳐간 검은 그림자를 길고양이도 아니고 바람이 날린 나뭇가지도 아닌 동양인 남자였다고 단정해버린 이유는 자신도 자세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곽이 돌연 멈춰 서버린 탓에 흥이 깨져버린 안느가 스페인 어로 뭐라 뭐라 씨부렁거리는 가운데 곽의 머릿속에 다다미 바닥에 화르르 피어나던 핏빛 모란이 눈에 본 듯 떠오른 이유만은 왠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았다.

 =아들놈은 아직 탐욕에 영혼을 팔지 않았는가. 혹은, 딸년의 효심은 영영 말라붙고 말았는가. 아직 곽을 찾아온 이는 없었다.

오쵸를 익힌 곽은 안느와의 합에서 제법 땅게로 역할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