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59 (금)
렛츠 탱고- 2
렛츠 탱고- 2
  • 이주혜
  • 승인 2014.12.02 2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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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다미 바닥을 적셨던 검붉은 핏자국은 그런 결론에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사족이라 여기고 싹둑 잘라버렸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 자신에게도 두 번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게 늙은 곽에게 새로 생긴 버릇이었고 곽은 그 변화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안녕, 낯선 사람들.

 가장 늦게 일어난 베르베르가 티셔츠 밑으로 배를 벅벅 긁으며 부엌에 들어섰다. 베르베르는 얼굴도 시커먼 게 하는 짓도 더러웠다. 부엌데기 안느조차 베르베르의 파트너 역할은 썩 내켜 하지 않았는데 정작 베르베르는 여자들이 자신과 춤추기를 꺼리는 이유가 인종차별이라고 투덜거렸다. 곽은 마리에따가 자신보다 미국인 크로스를 더 자주 상대해주는 것도 인종차별인지, 혹 노인 박대는 아닌지 궁금했지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아침 식탁에 마리에따는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밀롱가에 탱고 출정을 나갔다가 어느 마초의 품에 안겨 밤새도록 흥흥거렸겠지. 곽의 콧구멍이 벌어지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안느가 피식 웃으며 곽 앞에 짭짤한 살라미 접시를 놓아주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그 법칙이 이 순간 곽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언감생심, 부엌데기 따위가. 난 간밤 꿈에서 열아홉 숫처녀를 상대했던 몸이란 말이다.

 # 하나 둘 셋 8자! 하나 둘 셋 8자!

 8자는 탱고 스텝의 기본. 발을 유려하게 움직이며 바닥에 수없이 8자를 그려야 했다. 곽은 스스로 만들어낸 한국말 구호를 중얼거리며 망고나무 아래를 누볐다. 늙은 관절은 삐걱거리고 단물 빠진 근육은 박자를 놓치며 헐렁거렸다. 오직 하얗게 새어버린 은발만이 망고 가지에 닿을 듯 들썩거리며 곽의 분투를 응원했다.

 하나 둘 셋 8자! 하나 둘 셋 8자!

 약 약 약 강! 약 약 약 강! 박자에 맞춰 8자, 8자를 연호하다 보면 입 박자와 몸 박자가 어긋나 허청거리기 일쑤였다. 에라이, 이놈의 팔자.

 팔자도둑은 몬하는갑다.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춥다 추워를 연발하던 어머니는 막내며느리로 시집와 막내아들을 까마득한 큰집의 종손 자리로 내줘야 했던 것을 자신의 박복한 팔자 탓으로 여겼다. 유난히 총기가 뛰어나고 재발라 늘그막 효도 덩어리로 묻어두려 했던 막내아들을 내주고 어머니는 몸속 깊이 한기를 품었다. 어쩌다 고샅길에서라도 마주치면 어머니는 누가 볼세라 서둘러 어린 곽의 이마를 쓸어보며 ‘팔자도둑은 몬하는갑다’ 중얼거렸다. 둥근 이마에 닿던 까슬하고 서늘한 어머니의 손바닥 감촉은 하릴없는 체념의 상징이 되어 오래도록 곽의 기억에 남았다. 생의 길을 걸어가다 난데없는 돌부리에 채어 고꾸라질 때마다 생이 내 맘대로 흘러갈 리 만무하다 체념하며 곽은 가만히 제 이마를 쓸어보았다. 가슴 속에 똬리를 튼 불덩이가 억울하다 억울하다 명치를 치받을 때마다 심장 대신 이마를 짚으며 다독이는 버릇은 곽이 어머니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어 사는 지금까지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 사이 애기봉분처럼 볼록했던 이마가 닳고 닳아 쭈글쭈글 밭고랑이 되었다.

 곽이 종손으로 지명된 것은 조부의 임종 자리였다. 전쟁으로 외아들을 잃은 백부가 까무룩 생명줄을 놓으려는 조부의 깡마른 손을 붙잡고 내뱉은 말은 ‘아버지 가지 마세요’가 아니라 ‘아버지 제 자식은 어째요’였다. 조부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백태 낀 눈을 부릅뜨고 방구석에서 자울자울 조는 어린 곽을 가리켰다.

 저놈으로 해라. 쓸만하다.

 그리고 조부는 장난처럼 숨을 거두었다. 방안 가득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곽을 향했다. 따가운 기척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곽은 조는 사이 입안 가득 고여 있던 침에 사레가 들려 눈물이 쏙 빠지도록 기침을 해댔다. 난데없는 지목에 얼이 빠져버린 어른들도 켁켁대는 곽의 등을 쓸어줄 생각을 못했다. 영원 같이 느껴지는 짧은 침묵을 깨뜨리며 누군가 아이고 곡을 시작했다. 곡소리는 전염병처럼 번지며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넘실넘실 넘어갔다. 곽은 낭자한 울음소리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누구도 구조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사는 게 참 무섭고 쓸쓸한 거라고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곽은 그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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