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1.2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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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66)
 212. 고향에서 나오던 날

 아버지의 신사복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고, 형에게 공부를 시키지 못할 정도가 됐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체국에 취업 시험을 쳤는데, 한자 실력이 부족해 취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보다 두 달 앞서 교회 장로님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공장으로 취직돼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계속 아이를 낳아 내 아래로 여동생이 5명이나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밖에서 아이들과 싸워도, 엉뚱한 짓을 하고 다녀도 한 번도 야단을 치신 적이 없고, 되려 아들 대신 욕을 들어줬다.

 그 대신 나는 속을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다. 공부벌레 형은 중학교 입학 시험에 7등으로 입학을 한 수재였는데, 그래서 부모님은 큰아들을 집안의 기둥으로 여겨 어렵게 대했다.

 부모님은 형에게는 많은 혜택을 주셨지만 나에게는 부족하게 대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엄마 왜 나는 안 해줘”하고 따진 적이 없다. 나도 형을 늘 우러러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궂은일은 항상 나에게 시켰다. 만화대여점을 할 땐 어머니가 점포를 비우면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점포를 봤고, 해수욕장에서 매점을 할 땐 중학생의 신분으로 점포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네 몇 분과 계를 했는데, 계주는 사면이 5㎝ 되는 쪽지에 10장 중 한 장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모두를 접어 방바닥에 던져 놓으면 표시가 된 쪽지를 잡는 사람이 그 달 곗돈을 받는 방식이었다. 나는 어머니 대신 계주가 표시된 쪽지를 다른 것보다 한 번 더 눌러 놓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집어 곗돈을 따기도 했다.

 내가 극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올 땐 그림을 배우러 나에게 찾아오던 우곤이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때 돈을 쓸 줄 몰라 돈이 생기면 돼지 저금통에 저축을 해왔는데, 서울로 갈 결심을 하고는 꽉 차 있는 저금통을 깨트려 잔돈을 지폐로 바꿨다. 그것만으로도 여비는 충분했는데, 아버지는 걱정이 되셨는지 외상값을 받았다며 나에게 돈을 건네주셨다 .

 그리고 극장 직원 중에 한 사람이 “제일극장 주인이 버스 영업을 하고 있으니 극장 직원은 공짜로 버스를 탈 수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는 ‘부산까지는 공짜로 갈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새벽, 동생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는 둘째마저 떠난다 하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으셨다. 아들이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서운한지 굳은 표정으로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삼천포 밖이라고는 중학교 때 진주 예술제에 가본 것 외는 없었다. 바깥세상은 어떤 곳일까. 만화계는 또 어떤 것일까.

 궁금한 미지의 객지 생활, 나는 꿈을 안고 배웅하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서울로 출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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