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1.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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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58)
 205. 격동의 시기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나라는 격동의 시기였다. 삼천포 시내에도 한 번씩 소란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늘 일간지 신문을 구독했다. 아버지 다음엔 어머니가, 그 다음에는 내 차례였다. 어버지와 어머니는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 수호지를 읽으며 이야기를 종종했는데 그때 두 분은 ‘송강’이나 ‘양산백’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 시절 신문에는 학생들의 데모가 많이 실렸는데, 최루탄이 터지는 사진을 보면 마치 작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마산에서 데모하던 학생의 시신이 바다에 떠오르는 비참한 장면이 실리게 된다. 그의 얼굴은 최루탄 파편이 한쪽 눈에 박히고 살이 부패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데모는 더욱 거칠어졌고, 1960년 4월 19일 극에 치달았다. 결국은 부통령 이기봉 일가가 자살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면서 조금 사그라진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장면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다시 참의원과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게 된다. 사천군에는 3대 국회의원으로 정갑주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고 4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신다.

 정갑주 선생님은 1906년 사천군 삼천포읍 이금동에서 태어나셨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 법학생으로 재학하던 시절, 학생대표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으며 일본 동경 중앙대학교에 다닐 때는 재일본 동경조선기독교 청년회 이사로 있으면서 민족운동을 하던 중 동경경찰서에 체포돼 옥고를 겪기도 한 독립운동가다.

 8ㆍ15광복 후 삼천포에서 ‘보흥의숙’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954년 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당시 삼천포읍을 울산시와 함께 시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국회위원 임기 중에 이승만 대통령을 삼천포읍에 시찰차 내려오게도 했다. 정갑주 선생님의 상대로 이재현 후보가 나섰다. 삼천포에서 꼽히는 부자 하정만(가명)의 사위였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와 친구여서 한 번씩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술을 한잔하셨다. 장인의 막강한 재력을 등에 업고 출마한 것이다.

 선거가 끝났다. 자유당 내에서도 유력한 정치가였던 정갑주 선생님은 한낮 풋내기 이재현과는 게임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이재현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이재현의 당선이 확정된 날 새벽 우리 집 앞에서 한 여자가 동네를 향해 “이 사람들아, 우리 정 선생이 삼천포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은공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표를 찍어, 이 나쁜 사람들아”라고 소리쳤다.

 정갑주 선생님의 부인 목소리였다. 여태껏 삼천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는데 그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이 서운해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4ㆍ19혁명이 지나가고 새로운 국회의원이 정해져도 동네는 조용해지질 않았다. 어디서 오는지 얼굴도 모르는 청년들이 한 번씩 우리집 앞, 이재현 의원의 장인집 골목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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