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8:27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1.13 0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억의 삼천포 시절(255)
 202. 도둑맞은 화풍

 임수 선생님은 거짓말 박사로 스타계열에 오른 후 텍사스 보안관, 차이나 박 등 잇달아 히트작을 내면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다. 그리고 흑석동에서 화실을 내고 만화지망생을 채용해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들어간다.

 사무실에 등용된 지망생들은 처음에는 다 그린 원고에 지우개질을 한다든지 먹을 간다든지 궂은일부터 시작했고, 그 다음엔 배경 펜터치를, 조금 더 익숙해지면 인물 펜 터치를 하다가 나중에는 데생까지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직접 관리하는 팀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른 무명작가가 선생님의 그림을 똑같이 그려와서 원고를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형태를 외주 제작팀이라 불렀다. 어느 날 인천에 사는 모 작가가 그림을 베껴 그려 서울로 찾아와 임수 선생님에게 원고를 내보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자기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퇴짜를 놓는다.

 원고는 팔지도 못하고 쓸모없어져 버렸다. 무명작가는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먹은 밥은 벌써 소화가 됐고, 정오가 훨씬 넘어서자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인천까지 갈 차비마저 없어 밥을 먹는 것은 생각 치도 못할 형편이었다.

 기도 차고 힘이 빠져 그만 길가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때 옆에서 가판을 하던 이극환(가명)이란 사람이 “형씨, 왜 그러고 있소”하고 말을 건넨다. 무명작가는 자신의 기구한 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팔지 못한 원고를 원망한다. 이극환은 그 청년의 사정이 안돼 보여 “그럼 그 버릴 원고를 나에게 파시오”하고 제안한다.

 무명작가는 이 원고가 임수 선생님의 화풍을 베껴 그린 것이니 임수 선생님이 사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배고픈 김에 이극환이 주는 대로 받고 팔아 버린다.

 그리고 받은 돈으로 점심을 사 먹고 인천으로 떠나버린다. 임수 선생님의 모작을 사게 된 이극환은 부산 출신으로 그때 사정이 좋지 않아 가판 장사를 잠시 했지만 머리 회전이 잘 돌아가는 영리한 청년이었다.

 그는 원고를 가지고 동네에 있는 출판사로 향한다. 출판사 사장은 원고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 당시 최고 인기 작가의 임수 선생님의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이 작품을 출판키로 한다. 그리고 작가 이름도 임수 선생님과 비슷한 ‘향수’로 출판한다. 그 후 책이 출간됐는데 놀랍게도 그 작품이 히트한 것이다.

 임수 선생님에게는 기막힌 일이다. 필명도, 화풍도 비슷했으니…. 지금이라면 고소감지만 그 당시 임수 선생님은 화만 부글부글 끓일 뿐 달리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극환은 다시 다른 작품을 그려야 하는 데, 자신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니 특별한 수완을 부린다. 그것은 임수 선생님과 가장 비슷한 일본 만화를 택해 다음 작품으로 정하고, 출판사에 만화를 그리겠다고 찾아오는 학생을 자기에게 붙여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일본 만화를 학생들에게 그대로 그리게 해 인기 작가로 올라서게 된다.

 그때 동원된 학생 중에는 나중에 한국 만화계의 거물이 된 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필명은 이향원, 강철수, 한희작, 서남국, 우상구, 김철호, 허영만 등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