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작전을 수행하던 선무 부대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중공군에 놀라 몸을 움추리고 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비상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조금 뒤 중공군이 다시 나타난다. 양손을 번쩍 들고 한손에는 전단지를 들고 있었다. 대원들은 직감적으로 ‘투항이다!’라고 생각했다. 여태 고생한 것에 대한 첫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손을 들고 걸어오는 중공군이 가까워질 무렵 대원들은 달려가서 그를 얼싸 안으며 반겼다.
이때 투항한 중공군은 제1야전대 194사단본부의 문화 소대장 서춘발이었다. 그는 유격대 본부에 가서 “개풍 지역에서 작전하던 인민군들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다. 대신 중공군 2개 사단이 연백지구와 개풍군에 각각 포진해 있다”고 털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공군이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지 상세히 일러 줬다.
아군은 적의 위치를 몰라 애를 먹고 있었던 차였다. 서춘발이 투항한 이후 다섯이나 더 투항했다. 놀라운 성과였다. 아군은 서춘발이 알려준 적의 거처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중공군은 방심하고 있다가 아군이 느닷없이 들이닥치자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항복을 했다. 그렇게 풍덕리에서 아군을 괴롭히던 적이 소탕되고 큰 성과를 올리게 된다.
풍덕리 전투의 승리로 아군이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고 나중에는 김포 지역을 점령한다.
이 공으로 영의는 5816 유격대 표창까지 받는다. 만화를 천대시했던 우경희는 전쟁에서 만화가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며 많은 감회를 느낀다.
드디어 전쟁은 끝나고 영의와 우경희는 재대해 각자 자기 길로 가게 된다. 우경희는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 불새에서 삽화를 그려 이름을 날리더니 조선일보 등에서 삽화를 그리며 1960년~1970년대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삽화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영의는 ‘임수’라는 필명으로 만화가로 나서 ‘거짓말 박사’로 인기를 얻어 우리나라 스타 만화가 반열에 들어선다.
우경희는 영의를 처음 만났을 땐 만화를 그린다고 하찮게 봤는데, 전쟁에서 그 진가를 인정하게 됐다. 또 두 사람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후에도 명동의 다방에서 자주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 이후 우경희는 1983년 미국 시애틀로 이민을 가게 된다. 미국에 갔어도 두 사람은 전화로 서로의 우정을 다졌다. 그러다 우경희 화백은 200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