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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大夫(사대부)
士大夫(사대부)
  • 송종복
  • 승인 2014.11.05 2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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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송종복
 士:사 - 벼슬 大:대 - 높다 夫:부 - 사내

 조선시대는 관료사회로써 벼슬을 9품으로 분류했다. 그 중 문관의 4품이상은 大夫라, 5품이하는 士라 하는데, 뒤에는 문관, 무관, 양반 관료를 통칭해 사대부라 부른다.

 조선시대는 관료사회로서 문관 4품 이상을 大夫, 5품 이하를 士라고 했다. 그러나 사대부는 때로는 문관 관료뿐 아니라 문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쓰였다.

 이들은 중국 송나라 이후부터 형성됐다. 일명 진신(縉紳)ㆍ신사(紳士)라고도 부르는 층은 옛 귀족세력과 밀착돼 있는 불교와 도교를 타파했다. 사대부는 새로운 이론무기로서 성리학을 주창했다. 성리학은 실천윤리(實踐倫理)인 고대유교에 불교ㆍ도교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으로서 사대부층의 지배이념이요 사회윤리ㆍ가족윤리였다. 사대부들은 이러한 성리학의 교양과 경전해석을 체득한 독서인층(讀書人層)이었다.

 이들은 또한 중앙정치에서 지방으로 돌려 향촌 지배에 힘썼다. 유향소(留鄕所)ㆍ경재소(京在所)ㆍ향약(鄕約)ㆍ향청(鄕廳)ㆍ계(?)ㆍ향안(鄕案)ㆍ 향음주례(鄕飮酒禮)ㆍ향사례(鄕射禮)ㆍ서원ㆍ서당 등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문필(文筆)로써 무인(武人)ㆍ여인(女人)ㆍ이서(吏胥)ㆍ환관(宦官)을 누르고 오랜 기간 동안 승평(昇平)을 누리는 세계의 유례없는 문관정치를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체제 유지에는 성공했으나 근대화가 늦고 문약에 흐른 흠이 없지 않았다.

 전근대사회에서 관리는 일종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관직에 있을 때뿐 아니라 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죽을 때까지 특권을 가지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므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거 시험이나 채용시험을 거쳐야만 했다.

 사대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관리가 된 사람이나 퇴직한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이런 현상이 이승에서 저승까지 승계하는지 의문이다. 저승이란 음택(陰宅), 유택(幽宅), 유명(幽冥)이라 하는데, 이승에서 갖은 벼슬을 저승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는 장군의 묘역이 따로 있다. 지금은 관료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의다. 장군묘역만 따로 둔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으며 마치 사대부계급(양반)을 별역으로 둔다는 격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다 같이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며 심지어는 육군 병장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경우도 있다. 월남전 사령관인 채 중장은 자기의 묘를 장군묘역에 쓰지 말고 사병묘역에 같이 쓰라고 했다. 시대는 바뀌었다. 사대부도 없어졌다. 하여 생전의 벼슬(양반)을 사후에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계급상속으로 ‘돈키호테’ 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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