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1:04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0.30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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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46)
 195. 사라진 거금

 운영하는 학원이 번창하자 나는 한 가지 사업을 더 벌인다. 그것은 만화잡지였다. 아이큐 점프와 함께 어렵게 문공부에 잡지 등록을 하고 ‘만화잔치’라는 제호로 발간, 전국 총판에 보급한 후 한 번씩 전국을 돌며 수금을 다니곤 했다.

 1999년쯤, 나는 진주에 온 김에 삼천포 할머니 집에 들렀다.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인준 삼촌 가족이 여전히 살고 있어 집에 들어서면 늘 할머니가 계시는 것처럼 포근했다. 이제 숙모가 안주인이 되어 집과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정오께 대청마루에 숙모와 나란히 앉았다. 그날 숙모는 무엇인가 싼 보자기를 소중한 듯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궁금해 뭐냐고 물었더니 숙모는 각산 밑의 400평짜리 밭을 어떤 건설 회사에서 사고 2천만 원을 줬다고 했다. 지금 돈이 든 보자기를 안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그만한 돈이면 삼천포에서 집 두 채는 살 수 있었다. 그런 거금을…. 덜컥 겁이 났다. 처녀 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돈이 없어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숙모다. 시집와서는 할머니 그늘 아래 돈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분이 그 큰돈을 품에 안고 있으니, 나는 숙모에게 “숙모님. 그 돈 잘 간직해야 합니다. 그 돈은 숙모님이 평생 먹고 살아야 할 돈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숙모는 “그러고 말고, 내가 빌려 달라고 해도 안 빌려줄 거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소리에 ‘누가 빌려 달라고 했나? 내가 욕심을 냈더라면 벌써 내 돈이 됐을 텐데’하며 내 속도 모르는 숙모가 서운했다.

 그리고 할머니 유산으로 큰돈이 생겼으면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게 얼마큼 주지는 못할망정 차비 하라고 만 원 한 장 주지 않았다. 도리어 전처럼 내가 숙모에게 용돈으로 몇 푼 주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 후 숙모는 할머니 집을 몇 군데 수리한다며 30만 원을 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머지 돈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금이 생긴 후에도 숙모의 생활이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안방에서 콩나물을 키워 시장에 내다 팔며 생활하고 자식들과 학비 때문에 소란스러워지고, 이웃집과 몇 천원으로 싸움이 벌어지고…. 서울에서 친척이 내려오면 돈이 없어 밥상을 못 차려 손님들이 먼저 돈을 내어주면 그것 가지고 반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그 생활은 거금을 쥐고 있는 사람의 생활이 아니었다. 숙모의 변한 것은 매일 술을 먹고 취해 사는 것이다. 풍족하지만 돈을 쓸 줄 몰라서 술에 빠진 것인지, 돈이 사라져 그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숙모는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하다가 어느 날 아침 잔돈 때문에 이웃과 다투다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숙모는 자기 품에 안겨졌던 거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가버린 것이다. 숙모가 돌아가시자 돈의 행방은 더욱 묘연하게 된다. 어디로 간 것일까? 소문으로는 친정집 누구에게 빌려줬다는 말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할머니의 귀중한 유산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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