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7:04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0.21 2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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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39)
 189. 은영이와 포옹

 불이 조선달의 얼굴을 스친다. 연기는 숨을 쉴 수 없게 매스껍고, 열기는 뜨꺼워서 몸이 타 버릴 것 같다. 그래도 조선달은 숨을 참으며 얼굴을 모자에 파묻고 계단을 올랐다. 이층에 오르자 창밖으로 고함을 지르던 은영이는 이제 엎드려 있다.

 조선달은 은영이를 낚아채 급히 계단 아래로 내려온다. 불꽃 때문에 앞을 제대로 못 본 탓인지 그만 계단에서 미끄러져 은영이를 안은 채 굴러떨어진다.

 아찔한 상황에 조선달은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한 걸음 띄어 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시 꼬꾸라졌다. 절망적이다. 그래도 은영이에게 불길이 닿지 않도록 품에 꼭 감싸고 있다. 그렇게 쓰러져 정신이 몽롱해지려는 찰나 집 밖에서 강한 물줄기가 뻗어 들어 오더니 조선달 몸의 화기를 덮쳐 버린다. 조선달은 ‘소방차가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선달은 자기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정신을 차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은영이가 자기를 지켜 보고 있고, 그 뒤로 의사와 몇몇 사람이 있었다. 조선달은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은영이에게 “은영이 너를 만날 수 있다니, 꿈 같구나”하고 말을 건넸다. 은영이는 조선달 품으로 와락 달려들며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라며 흐느낀다.

 조선달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은영의 등을 자꾸만 쓸어 댔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조선달은 곧 사지에 힘을 줄여 은영을 안고 있던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앉았던 몸을 침대에 뉘인다. 그리고 숨을 거뒀다.

 의사는 죽음을 확인했다. 은영은 “할아버지, 죽지 마세요”하며 통곡한다. 그때 은영이 뒤에 서 있던 젊은 여인이 “숙자야,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 은영이는 고개를 돌려 “엄마, 이 할아버지 너무 불쌍해”라고 말한다.

 은영은 진짜가 아닌 숙자라는 소녀였다. 조선달이 이층에서 소리치던 숙자를 은영인줄 알고 구한 것이다.

 숙자 어머니는 평소 조선달이 죽은 손녀를 찾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숙자를 은영이로 착각한 사실을 안 것이다. 그래서 딸에게 “너를 구해 준 할아버지가 의식이 돌아오면 손녀인 것처럼 행동해라”고 일러뒀다.

 그래서 숙자는 조선달에게 은영이인척했고, 그 때문에 조선달은 은영이를 만났다고 착각해 편히 숨을 거둔 것이다.

 사라호가 지나간 지도 벌써 55년, 태풍은 늘 팔포의 허점을 노리더니, 이제는 재개발되어 손님을 맞이하는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 불리고 있는 클레멘타인의 슬픈 가사는 팔포의 슬픈 사연에 어울려져 더욱 애처로운 곡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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