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6:20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0.1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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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35)
 186. 바닷가 집 한 채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무섭게 내리치던 추석 다음 날, 나는 노산으로 올라가서 팔포를 바라보았다. 큰 파도는 방파제를 거세게 쳐댔고, 수십m 넘게 하늘로 치솟아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동네는 곳곳에 무너진 집이 있었고, 바다에 있던 배는 동네로 덮쳐 들어 뒤집혀 있었다.

 참담하게 변한 팔포, 시간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 맨 끝자락, 허물어져 가는 낡은 집에 조선달 노인과 외손녀 박은영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조선달은 이북 사람으로 1.4후퇴 때 처와 두 남매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이다. 피난을 오던 길에 인민군의 폭탄을 맞아 아내와 아들을 잃고 남은 딸과 간신히 팔포에 터를 닦았다. 몇 년 후 어른이 된 딸은 시집을 가고 혼자 남은 조선달은 작은 배를 장만해 그물과 낚시로 생선을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시집간 딸이 딸 아이를 하나 낳은 지 3년 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젊은 사위가 재혼을 준비하자 조선달이 어린 외손녀 은영이를 맡아 키우게 됐다.

 은영이는 귀엽기도 했지만 마음씨도 착했다. 조선달은 날씨가 좋은 날에 은영이를 배에 태우고 바닷가로 데리고 갔는데 은영이는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조선달이 일하는 것을 구경하다 피곤하면 배 구석에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조선달이 날이 궂어 은영이를 배에 태우지 못해 이웃집에 부탁하면 은영이는 그 집 식구들에게 싹싹하게 굴어 귀찮아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철이 들어버린 외손녀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조선달은 저녁밥을 먹고 자기 전에 은영이가 애교를 부리며 “할아버지, 고기잡기 힘들지? 내가 등 두드려 줄게”하고 계란만한 손으로 안마해줄 땐 정말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져 은영이를 꼭 안았다.

 그렇게 은영이는 7살이 됐다. 내년이면 학교에 가게 된다. 은영이는 종종 조선달에게 “학교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지 않아도 편히 먹고 살게 해줄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선달은 이 어린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주체하지 못할 기쁨에 사로잡혔다.

 은영이는 아침밥을 먹고 고기잡이를 하러 가는 조선달을 배웅했다가 저녁이 되어 조선달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바닷가로 마중을 나갔다. 그렇게 조선달과 은영이는 서로 정을 쏟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이웃에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양수복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다리가 불편해 취직을 못 하고 하는 일도 없어, 조선달은 양수복을 한 번씩 배에 태워 같이 고기를 잡으러 갔고, 잡은 고기를 나눠 주고는 했다.

 수복은 자기를 챙겨주는 조선달이 고마워 늘 배에 같이 타는 것을 즐겼다. 이렇게 은영이와 조선달, 또 이웃 청년 양수복이 사이좋게 어울려 살고 있었는데 사라호가 팔포를 내려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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