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1:16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0.07 2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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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30)
 181. 고향을 향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느 곳의 한 양계장은 축구장보다도 더 컸다. 요즈음은 기계로 닭에게 먹이를 주는 등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하루에 4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1970년대는 자동화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모든 분야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됐다. 그중에서도 병아리가 감별은 인력이 더 귀했다.

 1967년 한국에서 감별 교육을 받은 덕철이 형은 해외 취업을 알선하는 회사의 도움으로 이곳 프레즈노 농장에 자리 잡게 된다. 낯선 타향 양계장, 무엇이 썩는지 퀴퀴한 냄새, 주위엔 피부색이 다른 백인, 흑인들…. 처음에는 그들이 같은 사람으로 안 보여 말을 걸지도 못했다. 게다가 영어도 서툴러 소통이 되지 않았다.

 양계장 한쪽 구석에 자리한 감별팀에는 일본인이 15명 정도, 중국인이 10명 정도 있었다. 다행히 덕철이 형은 한국에서부터 줄곧 같이한 정진호라는 청년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먼저 온 한국인이 6~7명이 있었는데 덕철과 정진호는 그들과 함께 근무하게 된다.

 그렇게 한 달을 채우자 월급 1천200달러가 나왔다. 그 돈을 받는 순간 덕철이 형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것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금세 큰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덕철이 형은 가난한 동방의 나라보다 넓고 부유한 미국을 택해 터를 닦고 살기로 한다. 그래서 틈을 내 한국으로 와 집을 팔아 정리하고 두 동생에게 재산을 조금씩 나눠준 후 어머니와 남은 여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버린다.

 그 당시 덕철이 형은 한국경제가 성장할 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가족을 삼천포에 두고 홀로 번 돈으로 한국의 땅이나 건물을 사뒀더라면, 지금쯤 나라에서 손으로 꼽히는 재벌이 돼 있을 것이다.

 덕철이 형의 어머니는 미국 생활이 싫었지만, 아들이 하는 일을 거절하지 못했고, 타지의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어머니는 가족이 옆에 있을 땐 외롭지 않았지만, 아들과 딸이 회사로 출근하고 혼자 남게 되면 문제가 생겼다. 이웃이라고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뿐이었고 밖으로는 나가려면 어디가 어딘지 몰라 나갈 수 없었다. 자연히 집에만 있게 됐고, 점점 미국의 환경을 답답해했다.

 그러기를 일 년, 어머니는 고향 삼천포로 돌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졸랐으나 한창 돈 벌기에 바쁜 덕철이 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갈 처지가 안 됐다. 형은 어머니가 보챌 때마다 달래고 또 달랬고, 근근히 몇달을 더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이제 아들에게 보채기를 포기했는지 혼자 삼천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영어도 모르고 버스를 탈 줄도 모르니 걸어서 가기로 한다. 한국이 서쪽에 있다는 소문에 무조건 그쪽으로 가면 삼천포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날 필요한 짐을 챙겨 덕철이 형이 출근하자마자 일찍이 길을 나선다. 그래야 저녁쯤에 삼천포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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