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5 23:27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0.05 2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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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28)
 179. 병아리 감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군사 정변은 성공했고, 차츰 자리가 잡히자 조국 경제 부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1965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만성적인 가난을 면하기 위해 꽃다운 나이의 처녀를 간호사로 교육시켜 독일로 보내고, 또 청년을 뽑아 광부로 취업시켜 독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시절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간호사나 광부에 버금가는 돈벌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병아리 감별사’였다. 미국의 닭 농장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를 암수로 나눠야 하는데 그 작업을 손이 큰 서양 사람은 섬세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청년들을 교육시켜 미국으로 보내 취업을 시켜줬다.

 그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병아리 감별사는 월수입이 1천불이나 됐다.

 그사이 나는 만화를 그리겠다고 서울로 올라왔고, 만화 메카 신촌에서 잠시 2~3명의 만화가 선생님의 문하생 생활을 했다. 그후 하영조 선배를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불광동 독박골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독박골은 지금은 터널이 생기고 버스 노선이 생겨 사람이 붐비는 동네지만 그때는 북한산의 밑의 마지막 동네였다. 낮에도 등산객이 없어 인적이 드물었고 밤이 되면 소쩍새가 슬피 울어대는 산골 동네였다.

 그곳에서 나는 만화 창작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천포 멋쟁이 덕철이 형이 서울 산골 마을로 나를 찾아온다. 서울에서 병아리 감별을 배워 미국에 가서 큰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과연 덕철이 형다운 발상이었다.

 덕철이 형 계산으로는 미국에 가서 병아리 감별사로 취업하게 되면 매달 집 한 채 값씩 벌 테고, 10년만 노력하면 집이 100채도 더 되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짝사랑하는 양자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당시 우리 아버지는 삼천포에서 사업에 실패해 도피하다시피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 온지 이듬해 낙상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다섯이 방 두 칸짜리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덕철이 형은 병아리 감별을 다 배울 때까지 신세를 지자는 것이다.

 나는 덕철이 형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하늘나라에 간 형의 둘도 없는 친구이고 나하고도 친형같이 지내던 사이가 아닌가.

 그렇게 덕철이 형은 비좁은 방에서 나와 몸을 비비며 석달 동안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병아리 감별을 배워 삼천포로 내려갔고, 수속을 밟더니 금세 미국으로 떠났다.

 병아리 감별사 월급이 1천불이다. 당시 1천불이면 한국 돈으로 80만 원 정도이고 그때 덕박골의 웬만한 집이 20~30만 원이었다. 80만 원이면 시내에 나가도 작은 집 한 채를 살 돈이다.

 미국에 가서 10년만 일해도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문제는 10년이 아니라.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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