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2:16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9.23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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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21)
 172. 임가공 제작 회사 유니버설

 장인의 퇴직금을 유니버설에 투자, 설립한 정춘식은 회사의 소개서를 작성해 일본, 미국 등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공문을 보낸다. ‘우리 회사는 장편을 두 편이나 제작한 경험으로 어떤 작품도 소화할 수 있으니 하청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일본의 ‘다지노코’에서 답신이 왔다.

 그들은 서로 만나 계약하게 된다. 첫 작품은 제작하기 편한 만화체의 ‘다마공’이었다. 홍길동의 기존 애니메이터들이 주축이 됐고, 그 외 공문으로 모인 몇몇 멤버로 첫 작품은 무사히 끝났고, 다시 조금 까다로운 작품에 계약을 하게 된다.

 다음 작품은 널리 알려진 ‘독수리 5형제’였다. 무난하게 제작을 진행하며 회사 규모는 점차 커졌고, 그렇게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임가공 제작 회사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유니버설의 성장세가 지속되자,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회사를 설립해준다’며 유니버설의 애니메이터를 스카웃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립된 첫 번째 회사가 원화를 담당하던 김대중 부부를 위주로 설립된 윤성 프로덕션이고, 두 번째 역시 원화를 담당하던 정욱이의 대원 동화, 또 다음이 동화를 담당하던 유성웅의 교육 동화다.

 유니버설은 중요 애니메이터들은 그렇게 흩어져 갔다. 회사는 그들의 빈자리를 쉽게 채우지 못했다. 게다가 1980년 한호 흥업에서 본격적으로 미국 애니메이션을 들여오며 크게 성장했고, 애니메이터 스카웃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경쟁 통에 애니메이션계의 아버지 격인 유니버설은 애니메이터를 구하지 못하고 점점 쇠약해졌고 결국은 일감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 당시는 애니메이터에게 기본금을 주고, 작업을 하게 되면 추가로 수당을 주는 급료 형식이었다. 회사는 작업이 없어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백 명도 넘는 직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큰 난제였다. 그것이 한두 달 넘어서자 투자금이 바닥이 나고 빚만 남게 된다.

 이 사실이 일본 본사에 알려지게 되자 일이 들어오기는커녕 더 소식이 없었다. 아니, 일감이 있어도 애니메이터가 없어 작업을 소화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회사가 자본금을 다 까먹고 작업할 능력도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투자자 정춘식의 장인은 실망한 나머지 그만 음독자살을 해 버린다.

 하늘이 통곡할 노릇이다. 신동헌 선생님은 홍길동, 차돌바위, 유니버설 등에서 자기가 노력한 것에 대가를 받기는 고사하고 자기 탓으로 생사람까지 잡은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회사에 남은 빚은 선생님의 몫이 돼 버린다.

 신동헌 선생님의 사정도 모르고 이득만 챙기려는 사람들은 밤낮으로 빚 독촉을 해댄다. 이에 견디지 못한 선생님은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떠나 버린다. 한 시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선생님은 그렇게 쓸쓸히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대부라는 거창한 이름만 훈장으로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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