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8:39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9.22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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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20)
 171. 호피와 차돌바위

 세기상사의 후속 작품 제안이 있었고 선생님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 후 몇몇 영화사에서도 신작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 왔지만, 한 번 상처를 입은 선생님은 꽤 신중했다.

 그러던 중 신동우ㆍ신동헌 선생님의 합작으로 만화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이 있어 이에 수락하고, 다음 작품 구상에 들어간다. 보급 영화사는 극동흥업으로 정하고 신동우 선생님은 충무로 자기 사무실에서 스토리와 원화를, 다른 제작팀은 뚝섬에 있는 모 영화제작소에서 제작에 돌입했다.

 작품명은 ‘호피와 차돌바위’. 홍길동의 후속 작품이지만 홍길동은 등장하지 않고 주변에서 활약하던 차돌바위가 주인공이 된다.

 이야기 전개는 차돌바위가 홍길동과 이별하고 검술을 배울 스승을 찾다가 늑대를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 호피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그 후 길을 가다가 도적 곰쇠를 만나 동행하게 되고, 이들은 오랑캐와 결탁한 탐관오리 최진달과 맞서 싸우고 나중에는 호피의 헤어진 누이도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총 제작비는 800만 원 정도였다. 세기상사에서 계약금으로 500만 원 받고 그 이후 계약금보다 몇 배 더 지급된 것에 견주면 호피와 차돌바위 제작비는 너무 적은 것이었다.

 도저히 웅장한 이야기나 장면을 제작해 낼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잔재미를 보여주는 것에 포인트를 맞춰 제작을 이어간다. 그래서인지 스토리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또 1967년 2월부터 시작한 제작은 6개월도 채우지 않고 끝났다. 그러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없었다.

 모두 힘겹게 힘을 합쳐 제작을 끝냈지만, 대형 극장에서는 상영을 꺼렸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이 이유였고, 또 어린이 대상의 영화는 방학 기간에 한 철인데, 호피와 차돌바위는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에 제작이 완료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겨우 극장을 잡은 것이 청계천 세운 상가 안에 있는 구 아시아 극장이었던 동아극장이었고 개봉일은 8월 15일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고, 홍보도 시원찮고, 극장도 제대로 된 곳이 아닌 데다가 시기마저 좋지 않아 입장객이 많지 않았다.

 신동헌 선생님은 첫 작품 홍길동에 너무 기대하고 방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입장 수입과 제작비는 저울질해댔고 두 선생님은 이익은 고사하고 자기 집을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만화계의 거목이었던 두 형제는 온갖 공을 들여 2년 동안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했지만, 제대로 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흐지부지 빈손으로 마무리하게 되면서 한국 만화영화 계는 그렇게 호경기를 놓치고 말다.

 그 이후 신동우 선생님은 본업인 만화책 원고 제작으로 회유해 갔지만 신동헌 선생님은 애니메이션에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 무렵 TV 방송국인 동양 방송국(지금의 KBS2)의 회장 이병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 투자를 하게 된다.

 제작사는 제일동화였고 첫 번째 작품으로 ‘황금박쥐’를 제작하는데, 그 작업 일부를 한국으로 가져와 동양 방송국에서 애니메이터를 모집해 제작하게 된다. 이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것에 착안한 신동헌 선생님은 당시 홍길동 제작에서 같은 팀이었던 정춘식(가명)과 함께 그의 장인의 퇴직금을 털어 ‘유니버설’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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