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슬그머니 눈에 힘을 줄이면서 아래로 내리고 만다. 내가 박 선생님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박 선생님은 다시 문을 닫으시고 안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동료들에게 “오늘은 이만하자, 충분히 우리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니, 우리들 밥줄은 끊어 놓지 않을 거다”하면서 동료들을 설득해 그날은 그 정도에서 물러갔다.
그 뒤로 협회에서는 무슨 의결을 보았는지 우리 신인 만화 작가들에게 심하게 자격을 따져 들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그 뒤 한국일보 출판국은 10년 넘게 만화출판을 해왔다.
그러나 시작 당시 대여점의 고객들인 어린이들이 자라서 청소년이 되었다. 그들은 계속 만화대여점을 점검하고 있는 탓으로 이제 대여점 만화책들도 청소년화 되어 버린다. 그리고 청소년 위주의 작가들은 한 달에 50~60권씩 해 대는 작가도 나왔다.
이제 만화대여점에서는 어린이들이나 어린이 상대 만화책들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현실에서 만화를 공장화하여 다작을 하는 것을 싫어 하는 박기정 선생님은 단행본 창작 의지가 꺾이신다. 그즈음 1979년 중앙일보에서 부국장 대우를 받게 되면서 단행본 작품은 손을 떼시고 신문사 만평과 캐리커처에만 집념하시게 된다.
143. 마지막 유작
그 후 박기정 선생님은 1999년에 문화관광부의 장관 상을 받으시고, 또 2004년에는 보관 문화훈장도 수훈 받으신다. 또 2009년 코액스에서 전시하는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박기정 특별전도 전시하신다. 또 2012년에는 부천 만화박물관에서 개최한 ‘대통령 만화를 만나다’전에 몇 분 만화가들과 함께 캐리커처 전시회도 가지셨다.
한 세대를 만화로 풍미했던 박기정 선생님은 이제 팔순을 넘긴 노익장이시다. 그러나 아직도 생각하는 것이 젊은이 못지않고, 의욕 또한 그러하다.
나는 근래 선생님과 만나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옛날 만화가 협회에서 젊은 작가들 난동에 긴장했던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는 그때 협회 문을 박찬 것이 죄스러워 고개도 못 들었다.
그때 박 선생님은 앞장선 나의 기를 꺾은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유작으로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셨고 또 콘티까지 짜 놓으셨는데, 그런데 그만 사모님 몸이 허약해져 사모님 건강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준비한 작품에 손을 못대고 있다고 하신다.
나는 선생님에게 “부디 사모님 건강 되찾으시고 선생님 마지막 작품 원고 마무리하여 옛날처럼 한 번 더 히트 치시라”고 희망의 말을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