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5:46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7.16 0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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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75)
 계속 남하할 수가 없다. 러시아군에게 베개 속의 고액권이 발각되면 뺏길 것은 뻔한 일이고 자칫 생명도 위험한 처지였다.

 고민 끝에 가족은 러시아군을 피해 가기로 한다. 민가에서 며칠을 묵으며 달도 뜨지 않는 밤을 택해 산을 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 지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만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산세를 잘 아는 인근 주민에게 돈을 주고 길 안내를 부탁한다. 드디어 정해진 날이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오후 8시 정도인데도 벌써 산속은 컴컴해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민은 산을 어찌나 잘아는 지, 칠흑 같이 깜깜한 산길을 정확하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산을 오른다. 식구들은 앞장서서 걷는 안내원의 뒤를 바짝 붙어 산 등성이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또 골짜기를 향해 내려갔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무사히 강가까지 도착했다.

 그제야 칠흑 같은 어둠에서 건너편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하늘에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산을 넘었지만, 강을 건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군은 멀리서라도 그들을 발견하면 총을 쏠 것이다. 식구들은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숨소리와 물소리를 줄이기 위해 조심스레 한 걸음, 조금 쉬고 또 한 걸음 내딛으며 강을 건넌다.

 강물은 기정의 가슴을 지나 이제 목 근처까지 왔지만,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막내 기준은 강물이 목까지 차는지 턱을 위로 쳐들고 두 손을 벌려 중심을 잡으면서 곡예를 하고 있다.

 기정은 옆에서 기준을 독려한다. 다행히 기준의 목까지 찬 강물은 차차 아래로 내려왔고, 러시아군에게 들키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넌 후 동두천에서 의정부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서울까지 오게 된다.

 낯선 도시 서울, 식구들은 가져온 돈으로 신당동에 집을 구하고 자리를 잡게 된다. 얼마 후 일본에서 큰 형까지 와서 합세한다.

 곧 큰 형은 경북고등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고, 작은 형은 회사에 입사해 근무하게 된다.

 기정과 기준은 같이 장춘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춘초등학교는 야구의 명문 학교로 그해 전국 학생 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기정은 야구 클러치와 방망이를 사서 기준과 함께 놀고는 했다.

 그리고 그 당시는 박광현 선생님의 쌍칼, 푸른 만도, 김용환의 흥부놀부, 김의환의 푸른별, 어린 예술가, 김규백의 봉이 김선달, 김기창의 허생전 등도 나오고 있었다.

 삼 형제는 만화가 밥을 먹는 것보다 좋았는데, 가장인 큰 형은 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만화를 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삼 형제는 큰 형의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기도 하고 한적한 뒷골목에서 보기도 했다.

 큰 형이 결혼해 엄마 같은 형수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땐 함께 상왕십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은 잠시뿐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불과 5년이 지났을 무렵 나라에 6ㆍ25전쟁이 터지면서 이들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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