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9:45 (화)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7.10 2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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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72)
 133. 의리의 사나이 박기정

 선생님과의 사이를 말하자면, 내가 어릴 땐 독자와 작가, 내가 풋내기 작가 시절에는 한국 최고의 작가와 무례한 후배, 내가 원로 작가가 되어서는 좋은 선후배 사이로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다.

 오랜 세월 선생님을 보아온 나에게 그를 평하라면 ‘만화계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고 싶다. 옳은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는 성격의 소유자고, 동료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그 이유를 가려내 도와줬다. 또 돈 아끼지 않고 동료에게 술값을 지불하던 분이다. 그런 것을 두고 볼때 의리의 사나이라는 별명은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내가 ‘박기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시기는 1957~8년쯤 삼천포 한내다리 건너는 초입길에 새로 개업한 만화대여점에서다.

 1952~3년 우리집에서 만화대여점을 운영할 때는 책을 쌓아놓고 보았는데, 그 이후로 몇 년 간은 잡지에서 실리는 만화를 본다거나, 아니면 홍열이 형에서 빌려 보는 정도였다. 이후로 몇 년 간은 대여점 만화를 구경도 못하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화대여점이 생긴 것이다.

 나는 만화책이 보고싶었지만, 그 곳의 좁고 어둠침침한 분위기가 꺼림칙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어 들어가게 된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동네아이 7~8명이 쭈그리고 앉아서 만화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나이 많은 주인은 나를 보고 “어서들어오라”고 반기신다. 벽에 걸려있는 만화를 살펴 보았다. 순정 만화가 많이 띄었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머리를 길게 기른 소년이 눈보라를 맞으면 불쌍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가고파’라는 만화책이 보였다. 당시는 한국 아이들은 대부분 까까머리였는데, 긴머리가 새로웠다. 작가를 보니 박기정이었다. 또 형제인 박기준 선생님의 ‘두통이’도 보였다.

 그때 한 번 본 기억으로 그 작품의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무척 슬픈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박기정 성생님의 작품이 보이면 빠지지 않고 읽었다.

 박기정, 박기준 형제는 일제강점기 때에 포항에서 출생했다. 형제가 5명이나 됐고 막내로 누이가 있다.

 박기정 선생님 위로 세분이 형님, 아래로 박기준이 동생이다. 포항에 살적에는 아버지가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양재물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면서 윤택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해 가신다. 중국 동북부 간도땅을 거쳐 롱진 무단강을 건너 북만주 흑룡강가의 신도시 베이안에 도착해 그곳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아버지는 여관에다 운수사업을 하게 되고, 두 형은 일본으로 유학을, 남은 형제들은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에 입학해 다니게 된다. 이곳은 일본인과 만주인들이 대처하고 있어 살벌한 곳이었다.

 넓은 들판에는 러시아인들이 경영하는 목장이있어 우유와 빵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생활하는데 불편은 없었고 형제들은 한 번씩 개울가로 가서 붕어를 잡으면서 타향살이 외로움을 잊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날 일본 아이 열댓명이 들판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중국 아이 스무명 정도가 몰려와서는 다짜고짜 일본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본 아이들은 그에 맞대응을 했고 불시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작았던 일본 아이들이 더 맞기 시작했고 멀리서 보고 있던 박기정은 자기 학교 학생들이 몰매를 맞고 있는 장면을 보다 못해 싸움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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