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4:55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7.0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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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71)
 그리고 며칠 후 재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우는 저번 통화에서 했던 이상한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지 관리는 엄격했다. 교육부에서는 출제위원들이 문제를 확증하게 되면 그다음부터 출제위원이나 인쇄소 직원들 그리고 시험지를 만지는 모든 대상자의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그중에서는 1급 보안 대상자는 출제위원이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문제를 유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부에서는 문제가 확정되면, 이후부터는 출제위원을 호텔에 투숙시켜 시험이 끝날 때까지 관리했다.

 재우는 다음 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으로, 호텔에서 외부 출입금지, 외부 통화금지 등을 당하며 교육부의 관리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조급스러운 나에게 꼭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교육부 직원의 입회 아래 잠시 연락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능이 완전히 끝난 후 자유의 몸이 되어 나에게 다시 연락한 것이다. 재우는 다음 해도 출제위원이 되었다. 그 후에는 아들을 유학 보내기 위해 미국을 드나들더니 결국에는 짐을 싸들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다.

 명문 대학을 졸업한 부인은 참 친절했는데 이민을 가버린 후로는 영영 볼 수가 없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재우는 천성이 어질어서 평생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한 적 없이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점 때문에 나에게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서 만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미국으로 이민 갈 때까지 어울렸던 정겨운 친구.

 2014년 6월 나라는 청문회에서 정직한 국무총리감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나는 청문회에 무사히 통과할 사람은 재우 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재우 같은 스타일이 과연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와룡산 골짜기의 맑은 물을 공급받아 해마다 풍년을 누리던 기름진 벌리뜰. 광활하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던 이곳의 주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땅을 팔고 외국으로 타지로 흩어져 같다. 몇십 명에 불과했던 지주는 이제 천 명이 훌쩍 넘었다.

 벌리뜰 지주들은 논에서 나는 소출만으로도 아이를 교육하고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땅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은 유명한 재산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벌리뜰의 지주였던 우리 할머니는 나를 땅 상속자로 정하고 이리저리 구슬렸지만, 나는 만화가가 뭐 그리 좋았던지 할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항상 세상을 넓게 보고 살던 할머니는 자기 재산이 사라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끝까지 상속받지 않는 나의 불찰로, 할머니의 재산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항상 불효자가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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