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6:55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7.06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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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68)
 두꺼운 기와를 얹어 지은 고옥, 여중 교장선생님이 살던 정원이 좋은 집. 그 집 마당에 귀한 보물들로 가득했던 두 짝의 뒤주.

 수백억 원 가치의 귀한 물건이 왜 평범한 학교 교장선생님의 집에 있는 것일까. 그 답을 말하기 전에 먼저 1970년도 서부경남의 사회 구조를 알아야 한다.

 130. 싸구려로 팔렸던 문화재들

 1970년 초반 나는 삼천포로 내려올 때 고속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그때는 직행버스가 없어서 진주터미널에서 다시 삼천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었다.

 여기서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서는 진주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남강을 건너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가 그곳에서 삼천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 방법이 있었다.

 그때 버스정류장 근처 진주농고 쪽에는 뭔가를 지으려는지 불도저가 넓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판자로 길게 만든 간이 테이블에 건설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토기나 자기 같은 물건을 늘어놓고 여행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짓을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언론보도는 물론이고, 아마 건설은 중단되고 문화재 관리원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건설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던 그곳은 옛 가야 주민의 거주지, 혹은 귀족의 무덤, 아니면 왕릉이었을 것이다.

 건설 업자들은 관심도 없었고, 또 관청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건설 업자들은 땅을 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이 희한한 물건은 쓸어 모아 길거리에서 팔아 떡값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가야의 귀중한 유적지 한 곳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난한 만화가인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물건의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때 가격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가치로 토기 항아리 하나는 1만 원 정도 했고 물건들 대게 그 정도 가격대였다.

 나는 토기 항아리나 식기들은 비슷비슷해 관심이 없었지만, 한편에 금으로 장식된 작은 수박만한 도가니가 있어 가격을 물었다. 장사꾼은 토기값보다 배나 많은 2만 원을 달라고 했다. 생각보다 비쌌지만, 그것이 마음에 든 나는 용돈을 아껴쓰기로 하고 이 도가니를 사서 삼천포로 내려왔다.

 도가니를 본 어머니는 마음에 안들었는지 “무덤에서 나온 물건인데, 집에 두지 말고 당장 버리거라”고 하셨다.

 버리기는 아까워 혼자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을 다녀오니 그 도가니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도가니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집에 두는 것이 께름칙해서 지나가는 엿장수에게 줘버렸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문화재의 가치를 모르는 건설 업자들과 똑같았다. 나는 아까웠지만 화내지 못하고 도둑맞은 셈 치고 단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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