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1:22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6.26 2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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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62)
 124. 고바우 50주년 전시회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고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선생님에 대한 정보부의 지긋지긋한 사찰이 조금씩 수그러져 갔다. 그리고 선생님은 1988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1997년에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 제5공화국에서 다시 다른 정권으로 권력이 옮겨지면서 한때 전 국민이 지켜봐 왔던 네컷만화 ‘고바우 영감’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명맥은 유지됐고 2000년에는 ‘고바우 탄생 50주년’을 맞이하며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리게 된다.

 나는 김성환 선생님과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없었다. 굳이 찾아 말한다면 1950년대의 작가와 독자… 뭐 그런 사이였다.

 1952년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에 만화대여점이 들어서면서 선생님의 작품을 보았지만, 사실 그때의 나는 글이 많은 책을 제대로 볼 능력이 없었기에 내용을 자세히 기억지 못한다.

 그 다음 해에 나온 학원잡지 ‘꺼구리군 장다리군’은 작품 내용이 쉽고 재미있어 정확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오기 시작했던 성인용 잡지에 간간이 실리는 선생님의 작품을 보아왔다.

 캐리커처 잡지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희귀한 성인전문 만화잡지가 있었는데 당시의 성인 만화가들이 거의 동원된 잡지여서 나는 친구 형이 하는 서점에 앉아 즐겨봤다.

 그러다가 내가 만화가가 됐을 적에는 선생님은 신문사에 근무했던 관계로 나 같은 평범한 만화가들은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2000년 고바우 50주년 전시회 때는 내가 그 행사의 스태프로 일을 봐주게 된다. 난 그때 국만화가협회 임원으로 활동했었고, 다년간 일을 봐 온 권영섭 선생의 부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히 옆에서 선생님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작은 체구에 말수가 적고 속이 깊은 분이었다. 내가 행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서 도와드리자 늘 감사히 생각하셨다.

 행사는 며칠간 이어졌는데, 꽤 여러 분야에서 손님들이 왔다. 그중에 국회의원도 몇몇 방문해 내가 그들을 안내하고는 했다.

 성대한 전시회를 지켜보고 있는 나는 같은 만화작가로서 선생님이 부러워졌다. 한 장르를 위해 한눈팔지 않고 꾸준히 지키며 매달려 오신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권력 앞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온 것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속 깊은 그 성품, 그의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음 해인 2001년, 선생님은 후배들의 만화 창작 열의를 고무시키기 위해 ‘고바우 만화상’도 제정한다.

 선생님은 1천743회 연재의 ‘고바우 영감’으로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원화 작품이 나라의 문화재로 등록된다.

 1974년 소파상, 1973년 동아대상, 1988년 서울 언론인 클럽 신문만화상, 2002년 보관 문화 훈장상 등으로 각계는 선생님의 업적에 버금가는 상을 수여했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만화계의 큰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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