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6.2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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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59)
 극에 달하던 6ㆍ25 전쟁은 이제 휴전을 코앞에 두고 38선 주변에서 서로가 밀고 밀리지 않는 소강전으로 변질돼 갔다.

 김성환 선생님은 종군 화가로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 잡지 연재와 단행본을 그린다. 1951년 붓으로 그린 단행본 ‘사육신’을 그리고 ‘토마스 목사 얘기’도 그린다. 또 만화체의 ‘도토리 용사’도 출판한다.

 다음 해에 발간된 ‘학원’에서 선생님은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연재함으로써 인기를 얻어 일급 만화가로 인정받는다. 그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악동이, 소케트 군, 세모돌이 네모돌이, 빅토리 조절구 등을 연재한다.

 그러나 당시는 일급 만화가라고 해도 지면이 넉넉지 않았고 늘 궁핍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시간만 나면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에 들러 기자, 소설가, 미술가 등을 만났다. 어느 날 소설가 이상노 씨가 선생님께 “신문사에 만화를 그려보라”는 것이었다. 그 신문사는 동아일보였고 이상노 씨가 그곳에서 문화부를 담당하게 됐다고 했다. 김성환 선생님은 신문에 자기 작품이 실린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때부터 네컷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고바우 영감’의 첫 시작이었다.

 그 때는 신문사 사무실이라 해봐야 방 한 칸에서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기사를 쓰던 시절이다. 고바우는 중년의 성인으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표정이 없는 캐릭터인데 잡지 ‘신태양’에 잠시 소개됐던 적이 있었다.

 고바우의 머리에 한 올 난 머리카락은 보통 때는 앞으로 약간 구부려져 있지만, 놀랄 적에는 빳빳하게, 뭔가에 질릴 적에는 꼬불꼬불하게, 화가 날 적에는 앞으로 똑바로 뻗치는 것이 감정 표정의 전부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주인공 이름을 지을 때 바위를 염두에 두고 ‘바우’라고 지은 후 성을 이것저것 붙여보았지만 모두가 신통치 않았고, 고민 끝에 ‘고’씨를 붙여봤더니 그 이름이 부르기 편해 ‘고바우’라 정했다.

 처음에는 원고료도 없이 시작했지만, 그 후 인기가 많아지면서 월급이 나왔고, 또 다른 신문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면서 주가를 높여 동아일보에서 젊은 나이에 국장 대우까지 받게 된다.

 122. 신문 만화 필화 사건

 때는 1957년 8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자식이 없었는데, 이기붕 부통령의 큰아들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이기봉 일가와 경무대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무렵 태풍 ‘아그네스’가 영호남을 강타하고 난 며칠 후의 일이다. 경주경찰서 서장실로 “나 이강석이요, 경찰서장 되십니까”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서장은 급히 전화가 걸러온 다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서장은 청년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귀하신 몸이 어찌 혼자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이에 청년은 “아버지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과 공무원들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소”하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서장은 만사를 제쳐놓고 풍수해 보고는 물론 자기 차에 태워 경주 유적지 답사와 저녁에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만찬을 제공했다.

 청년은 그 다음 날에는 영천경찰서에 대고 또 그런 짓을 한다. 영천에서는 돈 봉투까지 챙겼다. 그리고 숙소로는 경북 도지사 관사를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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