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6.1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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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56)
 119. 첫 작품의 탄생

 김동순은 이내 후회한다. 돈이 있어야 집을 사든지, 세를 얻든지 하는데 돈이 없어 방 한 칸도 못 얻을 형편이었다. 이상한 헛소문으로 땅을 못 팔게 했던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다시 만주로 들어갈 형편이 안돼 차일피일로 미루고 우선 가족의 생활만 챙겼다. 부인과 어린 딸은 처가의 친척 집에, 자신은 친구 집에, 아들인 성환은 하숙으로 보냈다.

 김성환은 경복고등학교로 편입했다. 만주에서 공부한 것이 한국과는 차이가 있어 편입이 어려웠지만, 학교에서는 그의 미술실력을 보고 입학을 허용한 것이다.

 김성환은 곧 미술에 두각을 나타내 2학년 때는 미술부 부장이 되기도 한다. 이 미술부에는 후에 우리나라 만화계의 대들보가 될 박기정 선생님도 가입한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친구분이 사정을 듣고 돈을 마련해 가족이 함께 모여 살라며 월세 보증금을 주셨다. 그 덕으로 가족은 잠시 모여 살게됐지만 수입이 없어 월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자 집주인에게 독촉을 받고는 했다.

 한번은 박동순이 독립유공자를 지원한다는 관청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 찾아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만주에서 귀농 사업을 할 적에 일본관청을 끼고 했다”며 “많은 돈을 벌었으니 대우를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김동순은 자기가 조선에서 의열단을 구성해 친일파를 응징하고 10년이나 옥살이를 했는데 이치에 닿지 않는 핑계로 지원을 못 해주겠다니 울분이 터졌다.

 일본의 압박을 피해 만주로 온 동포들이 살기 위해 귀농조합을 만든 것인데 그런 말을 하니 기막힌 노릇이다.

 나라는 좌우익의 편 가름이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 분단으로 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북에서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나라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마음이 조급해진 김동순은 서둘러 만주행을 결심하고 개성으로 가보았지만, 그곳은 이미 평민들은 건너지 못하는 장벽으로 변해 있었다.

 김동순의 서울 생활은 억울하고 서러운 일뿐이지만 다시 38선이 열리는 날을 고대하며 참아야 했다. 가족들은 월세 보증금 다 없어질 무렵에 다시 흩어지게 된다. 그래서 김성환은 독립유공자 자녀에게 제공하는 건물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당시의 만화계는 건물을 짓기 위해 첫 삽질을 하는 개척의 단계였다. 신문에서 옹초 김규택 선생님이 ‘정만서’, ‘정수동’ 등을 그렸고, 김용환 선생님이 ‘깡통 여사’를 그렸는데, 몇 주도 못 넘기고 중단됐다. 이유는 독자들의 ‘만화는 저질’이라는 인식 탓이었다. 그리고 박광현, 김용환 선생님 등이 지금은 딱지 소설이라고 칭하는 현대소설류에 간간이 단행본을 그려 출간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일간지 신문은 종이 한 장을 접어 4면으로 만들었는데, 정기 구독자는 사업체를 가진 사람이나 관공서 등이지 일반인에게는 보급이 미진할 때이다. 정기 구독자가 적었던 탓으로 신문의 판매는 학생이나 신문팔이 소년들이 길거리로 나가서 “조선일보!, 동아일보!”하면서 고함을 치며 팔았다.

 그때 김성환이 거처하는 건물에 신문팔이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신문을 팔고 나면 성환에게 보여주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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