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3:45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6.01 2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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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44)
 109. 감격의 금메달

 그 이후 나는 한 차례 더 운봉을 찾았고, 험한 세파에 휩쓸려 그를 한동안 잊고 산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피 끓는 용맹을 지닌 사내가 기분대로 살지 못하고 평생을 누워 살아야 하는 처지가 서러워 몇 번씩 자살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자 “운봉은 다시 삶의 의욕을 가지고 굳건히 일어선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1960년대 중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은 산업 건설을 해야 하는데, 자본금이 없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으로 건너가 차관을 요청했다.

 하지만 시원스런 답을 얻지 못하자, 이번에는 서독에 손을 내밀어 우리나라에서 서독으로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들여오게 된다.

 그 당시 서독 사람들의 눈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돈을 위해 젊은 청년들을 타국까지 보내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서독 하이델 베르크에서 1972년 제4회 장애인 올림픽 경기가 열리게 된다.

 지금의 나라는 경제 대국이고 스포츠도 강국이다. 그러나 1970년에는 경제적으로도 가난했고, 스포츠도 올림픽 중에 겨우 은메달이 하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1968년 척추 장애인만 참가하는 제3회 이스라엘 장애인 올림픽에 처음으로 2개 종목에 10명의 선수를 파견했지만 안타깝게도 메달을 하나도 획득치 못하고 쓸쓸히 귀국했다. 그리고 4년 후 척추 장애인뿐 아니라 다른 장애인도 참석하는 서독 하이델 베르크에서 개최된 제4회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 한국은 4개 종목에서 16명의 선수와 5명의 임원을 파견한 것이다.

 삶의 의욕을 가지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결심한 운봉은 몸 관리를 위해 양궁을 잡은 것이 계기가 되어 보훈처 지원에 힘 입어 선수가 됐고, 또 이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가난한 나라의 초라한 선수단, 그러나 그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이번 기회에 서독인들에게 가난 속의 한국은 그렇게 맥빠진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민족의 자존심을 보여주자”라며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탁구 선수 송신남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선수들은 경기에 임했고 곧 이들의 각오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송신남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이다. 응원하러 온 간호사, 광부들은 서독 하늘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운봉은 양궁 경기에서 한 발, 한 발 정성껏 쏘면서 다른 나라 선수를 제치며 결국 금메달을 추가하게 된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이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고 이 소식을 듣고 있는 조국에서도 난리가 난다. 금메달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계속 금메달이 쏟아져 이제는 4개나 되었다.

 서독에서 한국은 무능한 나라가 아니라 저력의 나라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제4회 장애인 올림픽 대회 한국 선수의 최종 결과는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 또 동메달 1개의 대성과를 올렸다.

 가난한 나라에서 부국을 향해 분투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의 노고가 결실을 보는 듯 연신 눈물을 흘리며 비서진에게 선수들이 돌아오면 김포 공항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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