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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ㆍ독립운동에 큰 발자취 남긴 개척적 학자
한글ㆍ독립운동에 큰 발자취 남긴 개척적 학자
  • 김루어
  • 승인 2014.05.18 21: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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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출신 환산 이윤재
▲ 한글 한자로 3ㆍ1 운동에 참여했고 북경대학 사학과를 나온 민족주의 교육자인 김해 출신 한뫼 이윤재 선생의 기념조형물이 김해시 외동 나비공원에 서 있다.
신채호ㆍ이은상 등 교유
안용복ㆍ이순신 일대기
대표적 2대 작품 수난
70여편 넘는 글들 남겨
전집 출간 안 돼 아쉬움

 벌써 저물어 간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도. 하지만 여느 봄과 달리, 곳곳에 핀 꽃도 향기롭지 않고 자못 짙어가는 신록도 싱그럽지 않을 만큼 침통하기 짝이 없는 봄이다. 세월호… 사고가 난지 한 달이 넘지만 여전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재(人災). 어떻게 이런 원시적인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지, 인간에 대한 절망은 너무 커서 분노가 되고 희망은 너무 작아서 눈물이 난다. 가끔 자문을 구하곤 하는 학자 두 분과 세월호 사건을 두고 대화를 나눌 때,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다. 작은 희망이란 세월호가 침몰할 때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한 이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이지 극소수였다. 그 작은 희망이나마 등불로 삼아 희망의 영역을 넓히려고 살아있는 동안은 애써 보는 수밖에… 다른 한 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되려면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세월호 사건은 내게는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김해기행은 길을 따라가기보다 희망이라는 등불을 든 이의 삶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이는 국어학자이자 독립투사인 환산(桓山) 이윤재(李允宰:1888~1943)다.

 내가 환산을 책에 있는 위인으로서가 아닌 현실에서의 질감을 가진 존재로 접한 때는 90년대 후반이다. 당시 나는 내 인생을 덮친 파도 하나에 난파하여 길을 잃고, 혹시 책에는 길이 있을까 하여 김해도서관에 드나들고 있었다. 출근하듯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가 책을 뒤적이다 퇴근하듯 저녁에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 가니 휴관이었다. 공휴일인지 모르고 도서관에 갔던 것. 도서관마당을 서성이며 난감한 기분을 달래던 중, 입구 뜰에 선 이윤재 흉상과 그 아래, 1929년에 환산이 서울 경신학교에서 한글과 조선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한 말을 새긴 어록비가 눈에 들어왔다.「 … 나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도서관에 드나들 때부터 본 어록이기는 하지만 그날은 그 의미가 새삼스러웠다. 경우와 처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당시 내게는 환산이 가진 것과 같은 믿음과 희망이 필요했었지만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는 환산의 이 말은 선지적인 정언이 되었지만, 그러면, 칠흑 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저러한 믿음과 그 믿음을 희망으로 키웠던 환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환산은 1888년 12월 24일, 현재는 대성동이 된, 경남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까지 한학을 공부하다 김해 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답곡리로 돌아와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1911년 마산 창신학교로 옮겨 한글과 조선사를 가르친다. 당시 창신학교는 경남지역 반일사학의 중심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는데, 교원으로서는 국학자 안확(安廓)과 후일 조선어학회 동지가 된 김윤경(金允經:1894~1969)이 있었고, 학생으로는 역시 뒷날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을 함께 연찬하는 동지가 되는 이극로(李克魯)와 이은상(李殷相) 등이 있었다. 1918년 환산은 평북영변에 있는 숭덕학교로 옮겨 학생들에게 한글과 조선사를 가르치다 다음 해 3월 2일 전일에 서울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서를 반포하다 피체된다. 일제 재판부가 1년 6월형을 언도하자 그는, 조선 민족이 독립을 획득하는 것은 강탈당한 물건을 되돌려 받는 것과 같음으로 죄가 되지 아니한다, 고 통박한다. 하지만 망국민이었기에 옥고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환산. 1920년 7월에 출소하자 환산은 옥고로 시든 몸을 추스르고 1921년 6월 북경으로 망명한다. 거기서 민족사학자 신채호(1880~1936)와 교유하며, 다음 해에는 안창호 입회하에 흥사단에 가입하고, 북경대학에서 수학하다 1924년 7월 귀국한다, 3년 만에.

 그는 더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9월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五山)학교에 초빙받아 한글을 가르치면서, 교과 외로 조선사를 가르치다 일 년도 넘기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해직 당하자 그는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다. 이후 십수 년에 걸친 환산의 활동은 눈부신 바 있다. 그는 한 사람이면서 여러 사람이었다, 삼두육비(三頭六臂)로 화한 손오공처럼. 동덕, 협성, 배재, 경신, 중앙 같은 (女)고보나 연희 같은 전문학교 강단에 설 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사였고,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쓸 때는 민족적 색채를 분명히 한 문사였고, 수양동우회 활동에는 그 누구보다 열렬한 지사였고, 조선어학회와 진단학회에서는 국학의 광맥을 캐는 개척적인 학자였다. 이렇듯 환산이 활동한 분야는 여러 분야였지만 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사상은 하나였다. 독립! 독립에 대한 그의 믿음은 너무나 확고해서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든 그는 자기 사상을 숨기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너희들은 독립을 보리라(1929), 라는 어록도 이 무렵에 나온 발언이다.

 당연히 그는 일제의 갑종 요시찰인물이 되었고, 따라서 그의 글에는 검열이 심해졌고 삭제는 필수적으로 수반되었으며, 심지어는 출판 금지조치를 당했다. 수난을 당한 그의 글들 가운데 둘만 들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조선조 숙종 때 왜인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안용복을 그린 쾌걸 안용복(1926년)과 임진란 때 왜로(倭虜)로부터 나라를 지킨 이순신의 일대기를 전기화한 성웅 이순신(1931년)을 들고 싶다. 특히, 성웅 이순신은 독자반응이 뜨거워 재판에 돌입하자 일제는 출판금지조치로 대응한다. 하지만 그는 위축되거나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단에서 언론에서 학회에서 조직에서 이전처럼 변함없이. 하지만 항일세력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사가들은 1919년에서 1931년까지를 일제의 문화통치기라고 한다. 초반기 몇 년간은 이런 규정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후반기로 가면 문화 통치는 허울만 남는다. 이는 우리 민족이 6ㆍ10만세운동(1926)과 광주학생운동(1929)으로 일제에 강력 저항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는 문화통치라는 허울마저 벗어던지고 국내외 항일세력 탄압을 본격화한다.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환산의 비타협적 행보는 돋보이는 바 있다. 왜냐하면, 탄압이 노골화되는 것과 비례하듯 명망 독립 운동가들의 변절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환산도 관련자로 피체되어 일 년 반이나 옥고를 치른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도 열외는 아니다, 핵심역할을 한 이광수 주요한 등이 변절한 것에서 보듯. 당시 국내외 정세로 볼 때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37년 중국을 침략한 이래로 관동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고, 4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국내 좌ㆍ우파 항일조직들이 와해되다시피 해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변절하지도 않았고 독립에의 믿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조선어학회 다른 동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한글, 바로 우리말과 글이었다! 그렇다, 한글이 그들에게는 등불이었다, 어둠을 밝히는. 그들은 한글이라는 등불이 살아있으면, 한글이라는 등불을 지킬 수 있으면 지금은 비록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 있지만, 희망이라는 불빛을 점차 늘려나가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고 표준어를 사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준칙을 정하고 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어휘를 수집하고 한글을 보급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갈망하던 사전을 완성하기도 전에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42년 10월 환산은 이극로 최현배 한징(韓澄) 등 조선어학회 동지 32인과 함께 일경에게 피체되어 그중 29명이 함남 홍원, 함흥 경찰서에 분산 수감된다. 그들은 일경에게 1년 동안 온갖 야만적 악형을 당하다 그중 환산을 포함한 16명이 치안유지법 내란죄(독립운동 죄)로 기소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공판을 기다리던 중, 환산은 1943년 12월 8일 한징은 1944년 2월 22일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 최종공판에 넘어간 12명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이극로(6년), 최현배(4년), 이희승(2년 6개월), 정인승(2년) 4명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도 이틀이 지난 뒤에야 함흥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씁쓸한 것은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에 우리 민족의 마지막 남은 등불인 한글을 지키려다 순국하거나 고난을 겪은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인사들이 그들의 공적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독립정부가 수립되고도 십수 년이나 지난 뒤인 1962년이었다. 순국한 한징과 환산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환산의 경우는 지난 91년 생장지인 김해 봉황동 김해도서관 안뜰에 흉상과 어록비가 세워졌고, 2005년에는 외동 나비공원에 환산 기념조형물이 세워졌다. 가긍(可肯)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환산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본령인 국어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가 남긴 70여 편이 넘는 글들이 정리되어 전집으로 출간되지 못한 현실이다. 이는 아쉬움을 넘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위인들 가운데 학자나 문인 같은 저술가는 내면화된 정신이 행동이라는 외면화로 나타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저술의 출판은 필수다. 월북인사나 평가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은 살아있는 이들의 전집까지 나와, 전집으로 넘쳐나는 작금의 출판 현실에 비추어 보면 환산에 대한 이러한 홀대는 납득하기 어렵다. 만약 상업적 손익에 대한 전망이 그 주된 원인이라면, 국어학계나 한글학회도 그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한글운동에 족적을 남긴, 이 지역 출신 한글학자 눈뫼 허웅의 선양사업에는 이런 홀대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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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2014-05-19 09:42:39
한산 이윤재 선생님이 남기신
너희는 기어코 독립을 보리라...
신념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신 그 분의 정신을 사모하게 됩니다
꽃나무가 꽃을 피겠다는 자신의 신념과 희망을 저버린 적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저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전집이 나오지 않은 것에 저도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인님의 글 속에 담긴 오롯한 신념을 느껴봅니다
오월, 다시 밝은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

효원 2014-05-20 21:56:18
요즘 아기들은 세상에 눈을 뜨자마자 비쳐지는게 한글일겁니다
흔하디 흔해 그 소중함을 모르는.

어디선가 글을 읽었습니다
산소의 소중함을 알려면 잠시라도 목을 조르면 금세 깨우치게 된다고.
비유가 이상하지만요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의인들이 있었기에
제약없이 쓸 수 있는데,
너무 풍요로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소중한 것을 오용하고 망각합니다
생각이 깊어질 필요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