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8:11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5.15 2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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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33)
 102. 사랑했던 모나리자

 6ㆍ25 전쟁은 전국을 초토화 시켰다.

 서울 명동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충무로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온전한 건물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시는 폭격으로 일그러진 명동에 새로 구획 정리를 하고 길을 만들고 명동 성당, 국립 극장, 중앙 극장과 서울 우체국 등을 지었다.

 그러자 국립 극장 주위로 예술ㆍ문화인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다방과 술집이 생겨났다. 서서히 명동은 ‘문화의 거리’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국립 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가서 ‘아네모네’라는 다방이 있었다. 다방 주인은 주요섭 선생의 소설 ‘아네모네 마담’을 본따 다방 이름을 지었는데, 그탓인지 문화인들이 꽤 모여들었다.

 그리고 아네모네 다방은 젊고 예쁜 마담이 있었는데, 마담은 자기가 앉아있는 테이블 뒷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걸어 놓았었다. 손님들은 이 마담을 벽에 걸어 놓은 모나리자와 닮았다고 해 ‘모나리자’라고 불렀다.

 지독한 전쟁은 차차 진정돼갔고, 김용환 선생님은 학원과 기타 잡지 등에 연재를 하게 되면서 작품 활동과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셨다.

 선생님은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지인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로 이 아네모네 다방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담인 모나리자와 가까워지게 된다.

 모나리자는 선생님이 좋았다. 다정한 성품도 좋았지만 신기에 가까운 그림에도 매료되었고, 늘 기분 좋게 모임의 차값을 내는 그 호탕함도 좋았다.

 그래서 모나리자는 선생님이 다방에 오면 항상 그 옆자리에 앉아 애교를 부렸는데 선생님의 지인들은 “저러다가 둘이 정들겠다”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두 사람은 정이 들어가다가, 마침내는 서울시에서 서대문구 홍제동에 문화인들이 모여 살라면서 문화촌을 형성해 줬는데, 그곳에 자리를 잡고 모나리자를 안주인으로 들인다.

 두 사람의 신혼은 꿈 같이 달콤했다. 모나리자는 현숙한 아내가 되어 선생님의 작업을 도우고 가정일도 충실했다. 아들도 하나 낳는다.

 평화롭던 어느 날 작업을 하던 선생님은 방정리를 하고 있는 모나리자가 너무나 예뻐 그 자리에서 모니라자를 앉혀놓고 크레파스로 얼굴을 그렸다. 선생님은 그토록 모나리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 그림은 문하생인 안모 선생님이 간직하고 있다가 근래에 강남의 모 외국어 학원 원장님이 넘겨받아 소장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 아이가 엄마 없이도 혼자 놀 수 있을 무렵, 모나리자는 이제 가사가 줄었다. 남편은 화실에 나올 줄 몰랐고, 한 번씩 서울로 업무차 가버리면 통금이 가까워져야 집에 들어왔다.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하루하루가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나리자는 원래 많은 손님들로부터 선망을 받던 마담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종일 할일 없이 집에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졸라 홍제동 대로가에 점포를 얻어 모니리자(가칭)라는 간판을 걸고 다방을 오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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