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7:47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5.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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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30)
 99. 만화계의 대들보 김용환 선생님

 내가 김용환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접한 때는 1953년 아버지가 부산에 출장을 다녀오시면서 사온 ‘학원’ 잡지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이다. 그때 이미 김용환 선생님은 대가의 면모를 보이고 계셨다.

 둥글둥글하게 그린 그림체는 현재까지 나온 삼국지 만화책 중 한ㆍ중ㆍ일을 통틀어 최고의 수작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원 잡지의 소설 연재 삽화를 그려 학원을 최고의 잡지로 부상시킨다. 선생님이 삽화를 그릴 적의 학원은 우리나라 교양잡지로는 최고의 잡지였고 아직도 학원에 버금가는 학생 교양잡지가 없을 정도다.

 한국 잡지 역사상 학생 대상의 잡지가 1953년에 출간됐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작품은 ‘만화세계’에서도 볼 수 있었고, 몇 년 후 유엔군 사령부가 발행한 잡지 ‘자유의 벗’에서의 작품은 이순신 장군의 해전도나 병졸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장관이었다. 그때가 선생님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선생님은 그림에 천재였다. 작가로서 성공하기에 필수 조건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진영의 유복한 잡안에서 11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때 김용환 선생님이 초등학교 시절, 학교 선생님 두 분이 연애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선생님은 그 장면을 화장실에 그려놓았는데, 얼마나 잘 그렸던지 다른 학생들이 그림 속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그것이 소문이 나면서 두 선생님은 사표를 내야 했다.

 또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시험 문제를 풀 길이 없어 백지를 내면서 시험지에다 당시 신문에 연재되는 삽화를 본떠 그려놓았는데,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이 실력을 알아보곤 입학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선생님은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기와바다미술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 무렵 ‘기타고치’라는 필명으로 소년 잡지에서 삽화를 그리고, 교포들이 발행하는 잡지에 연재하고는 했다. 그래서 ‘기타고치’라는 필명은 일본과 조선에서 삽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해방된 고국으로 바로 귀국해 버린다. 이 바람에 선생님의 원고를 받아오던 잡지사는 연락도 없이 사라진 김용환 선생님을 찾으려 애를 먹기도 했다.

 귀국한 선생님은 1945년에 단행본 ‘홍길동의 모험’을 그리고, 1946년에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하던 마해송 선생님의 소설 ‘토끼와 거북’을 만화로 그린다. 또 그해 9월에 최초의 단행본 ‘흥부와 놀부’를 그리기도 한다.

 선생님은 작품 활동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만화가들의 모임인 한국만화가협회도 만든다. 그 당시는 만화가가 드물었기에 만화가들은 소설가, 시인, 연예인처럼 행사도 했고 그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명동의 길을 걷다가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청년을 보게 된다.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그림을 살펴보는데. 하도 잘 그려서 선생님은 그 청년에게 “나 기타고치요”하고 필명을 밝혔다. 이 청년은 일본에서 유명한 선생님을 한국 땅에서 보게 되니 깜짝 놀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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